[위기의 농촌] "모범농민 더 망하는 세상"

첨단농법 선구자 정의도씨의 분노

정의도(43ㆍ경남 진주)씨는 시설원예(비닐ㆍ유리하우스 원예) 작물재배 경력 10년이 넘는다. 이 분야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다. 주력 작목은 1,400평(7마지기) 규모의 비닐하우스에서 생산하고 있는 송이토마토.

토마토가 탐스럽게 익었지만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토마토 한알 한알에는 기쁨이 아닌 부채가 녹아있다.

정씨가 농협에 지고 있는 빚은 1억5,000만원. 연말까지 갚아야 하는 원금과 이자 2,300만원을 마련하는 게 발등의 불이다. 이중 1,000만원은 친한 사람에게 사채를 얻었다. 나머지 1,300만원을 위해 12월 초 농협을 찾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농협 빚을 얻어 농협 빚을 가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농협측은 뜻밖에 "대출한도가 이미 찼다"며 추가대출을 거부했다. 정씨는 "그렇다면 방법이 없다. 농협이 하자는대로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농업 첨단화로 남은 건 빚 뿐

그에겐 이제 방법이 없다. 당장 연말을 넘기지 못하고 신용파산자가 될 처지다. 그는 1997년 환경보호우수농가로 선정돼 내무부장관상을, 올해는 우수농업경영인으로 선발돼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농협장상과 진주시장상, 경남도지사상 등도 여러 차례. 하지만 벼랑에 몰린 정씨에게 이들 상은 파산의 증표로 바뀌고 있다.

정씨가 농협 빚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 농림부(당시 농림수산부)가 보조금을 줘가며 권장한 농업규모화, 첨단화에 호응하면서다. 논 1,400평에 비닐하우스 5개 동을 세우고 내부 시설을 하는데 3억원 이상이 들었다.

이중 농림부 무상 보조금은 1억2,500만원. 나머지는 농협 융자금과 저축금 등으로 충당했다. 이전까지 재래식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재배해 짭짤한 재미를 보아온 터라 농림부가 보조금까지 주며 권장한 첨단 하우스는 그를 꿈에 부풀게 했다.

농림부가 외국, 특히 네덜란드 모델을 가져와 보급한 한국 표준형 하우스는 1-2W형. 정씨는 1995년 말 하우스를 준공했지만 준공검사 나온 공무원은 시설이 완성된 것인지 여부도 몰랐다. 준공검사 후에도 바로 작물을 심을 수가 없었다.

외국모델을 그대로 가져온 탓에 하우스가 한국실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와 농대 교수 등을 찾아다니며 기술자문을 요청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부득이 시설원예 선진국인 네덜란드와 일본에 직접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시설을 참관하며 개량기술을 터득했다. 농림부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해 경비의 절반을 부담하고 농대 교수와 동행한 적도 있다.

외국 현지조사를 배경으로 2~3차례 하우스를 개보수하자 시설투자비 총액은 3억5,000만원으로 늘어났다. 작물을 심기 시작한 것은 최초 하우스 준공이 끝난 2년 뒤인 1997년 하반기부터. 2개 동에 고추와 송이토마토를 나누어 심었지만 정작 문제는 재배ㆍ관리기술이었다.


현지실정 무시한 기술 도입

농림부는 하드웨어인 선진국의 하우스는 도입했지만 적절한 작목과 재배기술 등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는 연구가 거의 없었다.

네덜란드 등의 컴퓨터 관리 프로그램을 그대로 들여와 권장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네덜란드는 한국에 비해 연평균 일조량이 훨씬 적고 토질도 다르다.

이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농림부는 네덜란드의 하우스 온도 및 급수량 조절, 양액(작물에 주는 양분액) 투여 데이터를 그대로 가져왔다. 작물이 제대로 자랄 턱이 없었다.

정씨는 농대의 관련 교수와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문의하느라 동분서주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이스라엘과 일본의 현지 하우스 농가를 찾아 노하우를 탐색했지만 단기견학에서 성과가 클 수는 없었다.

정씨가 현재 갖고 있는 재배ㆍ관리기술은 대부분 독자적 연구와 시행착오를 통해서 얻었다. 적정 양액 투여량과 온도조절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하우스에서 밤을 새운 적이 적지 않았다.

1998년 첨단농법의 고추와 송이토마토가 첫 수확됐다. 풍작이었다. 하지만 IMF위기로 경기가 전례없이 냉각되는 바람에 농산물값이 전반적으로 폭락해 운영비를 건지지 못했다.

1999년은 송이토마토로 작목을 통일했다. 다른 성분의 양액이 투여되는 고추와 송이토마토를 자동조절기계 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 1,400평 하우스에 값비싼 양액기계를 두대 설치하는 것은 비경제적이었다.

작년 송이토마토 판매수익은 6,500만원. 운영비는 덩치 큰 것만 계산해도 8,200만원이 들었다. 부대경비를 포함하면 2,000만원 이상 적자를 보았다. 연료비가 1,800만원이었고 자신과 부인 몫을 제외한 인건비도 1,600만원 들어갔다.

1년에 한번 갈아주는 비닐값과 비닐 설치비가 800만원, 양액비 등이 600만원이었다. 2,000만원을 주고 산 38마력짜리 트랙터의 감가상각비는 아예 비용에서 뺐다. 트랙터를 빌려쓰면 경제적이지만 농번기에는 적시에 빌려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샀다.

경비과다도 문제였지만 진짜 적자 원인은 값 폭락에 있었다. 지난해 출하량은 4kg들이 2만여 상자.

한때 상자 당 1만6,700원 하던 송이토마토가 800원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상자 당 포장비만 인건비를 제외하고 700원인 상황에서다. 지난해 출하품의 상자 당 평균 가격은 3,000원 남짓이었다. 상자 당 최소한 4,000원을 받아야 현상유지가 되는 상황에서 적자는 필연적이었다.

올해는 역시 1,400평에 송이토마토 8,000주를 심었다. 출하량은 작년보다 많지만 값이 떨어져 또다시 적자가 뻔하다. 올해는 기름값 상승으로 운영비는 더 먹혔다. 하우스 과일이 가장 비쌀 철인 요즘 4kg들이 한 상자는 지난해보다 1만원 정도 싼 6,800원.

경제난으로 과일수요가 준데다 수입과일이 들어와 국산과일은 설 땅이 없다는 것이 정씨의 말이다. 그는 "수입과일 사는 시민을 보면 미워죽겠다"고 말했다.


"대책없는 정부 농정의 실패"

정씨는 정부의 대책없는 농업 규모화ㆍ첨단화가 농민을 피멍들게 했다고 원망했다. 그는 정부의 허술한 신농업정책에 시험도구가 됐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첨단시설 농법을 도입하기 전만 해도 저축금도 있었고 누구보다 기반이 탄탄했다. 하지만 정부의 신농업정책에 발벗고 호응한 지 몇 년 만에 전재산을 털어도 빚을 갚기 어려운 처지로 몰락했다.

정씨는 10여년 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부모님이 계시는 이곳 진주로 왔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리어커를 끌고 미는 부모님이 안쓰러워서였다. 고향에서 제대로 된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연수까지 받아가며 농민후계자에 지정됐다.

"그동안 노력할 만큼 했고 연구할 만큼 했다. 그런데도 이 모양이 된 것은 정부 농정의 실패다. 하지만 농사를 계속 짓겠다. 이곳에는 내 뿌리가 있다. 난 농사에 인생을 걸었다." 정씨는 건실한 농민이 농촌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글ㆍ배연해 기자

사진ㆍ김명원 기자

입력시간 2000/12/19 20:25


글ㆍ배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