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세계경제] 한국, 금융경색 해소·구조조정 변수

2001년 한국 경제의 기상도는 깊은 기압골과 짙은 먹구름대로 시작된다. 한차례 호경기를 겪은 뒤라 국민이 받아들이는 '체감 경기온도'는 IMF한파가 몰아닥쳤던 1998년 초보다도 오히려 차갑게 느껴진다.

내년 상반기까지 우리 경제가 지루한 불황터널의 안에 갇혀있을 것이란 진단은 전문가 사이에도 전혀 이견이 없다. 쟁점이라면 언제쯤 다시 햇빛을 볼 수 있겠느냐는 것.

정부는 "하반기부터 다시 회복가도를 달릴 것"이라며 '여름 반등설'을 주장하지만 민간연구소 쪽에선 "기조적 하강기에 접어들어 재상승은 힘들 것"이라는 '내리막 대세론'을 펴고 있다.

몇몇 비관론자들은 "침체가 2년 넘게 갈 수도 있다"며 '장기불황론'을 내놓기도 한다. 그만큼 2001년 한국 경제는 전망의 스펙트럼이 넓고, 변수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상반기 마이너스 성장률 예상

우선 상반기, 특히 1ㆍ4분기를 상상해보자. 오직 '장미빛 렌즈'만으로 세상을 보는 정부조차도 비관적 언급을 숨기지 않을 만큼 내년초 경기는 잿빛이다. 재정경제부 당국자는 "올해는 나쁜 체감경기 하에서도 지표경기는 좋았지만 내년 상반기엔 체감은 물론 지표까지 나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전년동기 대비로 표현되는 경제성장률이 금년 1ㆍ4분기에 무려 12.7%에 달했기 때문에 내년 1ㆍ4분기 성장폭이 크게 꺾이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민간연구소들은 내년 상반기 성장률이 4%대까지 곤두박질칠 것을 예상하고 있다.

기업과 개인은 이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11월 소비자 전망 조사결과'에 따르면 6개월후의 소비상태를 예고하는 '소비자 기대지수'는 10월 89.8에서 11월엔 82.4로 하락하며 5개월째 내리막 행진을 이어갔다.

소비자 기대지수란 6개월후 소비를 지금보다 늘리겠다는 가구와 줄이겠다는 가구가 같을 때 100이 되며, 100미만이면 긴축가구가 확대가구보다 그만큼 많다는 뜻이 된다. 11월 소비자 기대지수의 가파른 하락은 최소한 내년 5월까지 개인 소비심리가 계속 쪼그라들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침체, 위축, 축소, 냉각의 파노라마는 기업도 마찬가지. 한국은행이 2,893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경기 조사결과'를 보면 내년 1ㆍ4분기 제조업 경기실사지수(BSI)는 67로, 1998년 4ㆍ4분기(55)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BSI도 소비자 기대지수처럼 100미만이면 향후 경기를 비관적으로 보는 기업이 낙관적으로 예상하는 기업보다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이처럼 개인 소비심리가 얼어붙고 기업 투자마인드가 실종된다면 경제의 활력은 기대할 수 없다.

내년 상반기가 비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구조조정 후유증으로 경제가 심한 몸살을 앓을 것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구조개혁은 전반적 부(富)의 증대를 위한 작업이지만 단기적으론 고통과 희생을 수반한다.


구조조정 후유증, 대량실업으로 이어질 듯

우선 기업구조조정의 핵심인 부실기업정리는 대량실업으로 연결된다. 11ㆍ3 부실기업 퇴출 여파로 11월 79만명까지 늘어난 실업자수는 겨울철 일자리 감소, 고졸ㆍ대졸생의 노동시장 신규유입 등 계절적 요인과 맞물리면서 내년 2월엔 100만명선을 돌파할 전망이다.

현재 기업을 옥죄고 있는 금융ㆍ신용경색도 구조조정의 결과다. 대형화를 향한 은행권의 연쇄 합병은 은행원의 대출태도를 극단적으로 보수화시킨다.

시중에 돈은 남아돌아가지만 기업부실이 완전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채ㆍ어음(CP) 매입이나 대출을 통한 자금공급은 위축될 수 밖에 없고, 그저 '리스크 제로'의 국공채에만 돈이 몰리는 '자금배분의 왜곡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상반기 비관론의 두번째 이유는 주식시장이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 않다는데 있다. 국내적 상승재료의 부재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한국 증시의 향도나 다름없는 나스닥이 장기부진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1

999년 폭발적 경기회복의 견인차가 바로 주식시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2001년 한국 증시에 먹구름이 가시질 않는 한 기업의 투자심리, 개인의 소비심리는 회복되기 어렵다.

미래 한국을 먹여살릴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지는 정보기술(IT)산업이나 벤처열기도 증시(코스닥)의 회복없이는 '거품'조차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년 상반기가 '어둠의 시간'이라면 초점은 하반기에 맞춰야 한다. 진념 재경부 장관이 말하는 '하반기 반등론'의 근거는 이렇다. "구조개혁이 연내 마무리되면 6개월 후부터는 효과가 가시화할 것이다.

기업구조조정이후 시장불안의 근원인 부실이 제거된다면 투신사들은 회사채를 사고, 공적자금 수혈로 클린화한 은행도 대출을 재개할 것이다.

다시 돈이 돌기만 하면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시작하고 개인도 소비에 주저함이 없어진다. 이렇게 된다면 내년 한국 경제는 잠재성장대인 5~6% 성장률, 3%이내 인플레, 50~60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는, 문자 그대로 안정형 구조가 구축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년 하반기 경제는 과연 진 장관의 이런 기대처럼 펼쳐질 수 있을까. 여기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구조조정의 효과가 발휘되려면 무엇보다 구조조정 자체가 옳게 매듭지어져야 한다.

11ㆍ3 퇴출조치에도 불구, 부실기업이 모두 정리됐다고 믿는 시장참여자들은 별로 없으며 특히 성급하게 봉합된 현대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으로 남아있다.

기업부실에 대한 시장불신이 남아있는 한 아무리 돈을 풀어도 금융경색은 타개될 수 없으며 경색이 지속되는 한 하반기 한국 경제는 반등은 커녕 IMF때와 맞먹는 금융ㆍ실물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둘째, 우리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경제는 반드시 연(軟)착륙해야 한다.

미국 경제가 급강하할 경우 '나스닥 침체→코스닥 부진→기업자금조달 애로→투자회복 불가→실물경기 침체'의 심각한 연결고리가 형성되고 대미수출마저 부진해져 성장둔화, 실업증가, 경상수지 악화등 경제 전반에 걸쳐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다.


경제논리가 우선되는 정책 시행돼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자세다. 내년 하반기가 되면 1년 앞으로 다가온 2002년 지방자치선거와 대통령선거를 향한 레이스가 시작된다.

과거의 선거정국에 비춰본다면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밀어내면서 '표'와 연결되는 선심ㆍ인기영합정책이 쏟아져나오고 '손에 피를 묻히는 식'의 구조조정은 더이상 시도조차 되지 않을 공산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으론 '생존전략'일지 몰라도 경제적으론 '자살행위'다.

생명을 건 수술(구조조정), 그것도 1차 수술을 겨우 끝낸 중환자에게 뜀박질을 시키고 고통을 잊으라고 독주를 권하는 것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남미식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으로 주기적 위기를 반복할 것인가, 어정쩡한 구조조정으로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영국병'을 이겨낸 대처 수상식의 구조개혁으로 만성적 '한국병'에서 벗어날 것인가. 2001년의 선택에 한국 경제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이다.

이성철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12/26 20:16


이성철 경제부 sc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