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적멸의 성전에서 맞는 새해아침

세월의 마디를 보내고 맞는 의식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소란스럽다. 침잠하며 새해의 소망을 빌만한 곳은 없을까. 산사, 그 중에서도 적멸(寂滅)의 성전인 적멸보궁은 어떨까. 적멸이란 열반(涅槃ㆍNirvana)의 의미.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일컫는다. 한반도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

7세기(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그가 직접 중국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사리와 가사(옷)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사리를 모신 곳이어서 불상이 없다. 대신 수미단(불단)에는 빈 방석만이 놓여있다. 새해를 맞아 비어있는 수미단의 뜻을 헤아려보는 여행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태백산 정암사(강원 정선군 고한읍)

카지노의 개장으로 천지가 개벽한 곳. 한동안 탄가루가 날리더니 이제 돈가루가 날린다. 정암사는 그 탁한 기운의 한 가운데에 연꽃처럼 피어있다. 대찰은 아니지만 포근한 분위기와 추상같은 절도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위엄있는 절이다.

탄허스님이 현판을 쓴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육화정사, 정면에 범종각이 서 있고 범종각 너머 적멸궁이 눈에 들어온다. 적멸궁은 고색창연하고 아름답다. 단청은 색이 바래고 기둥과 서까래는 잘게 갈라졌다. 지붕에만 반짝이는 새 청기와를 얹고 있다.

적멸궁 뒤 언덕에 사리를 모신 수마노탑(보물 제410호)이 있다. 석회암 벽돌을 채곡채곡 쌓아올렸고 상단부를 청동으로 얹은 7층모전탑(벽돌로 쌓은 탑)이다.


영취산 통도사(경남 양산군 하북면)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를 3보 사찰이라 부른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法寶), 송광사는 수많은 대승을 배출해 승보(僧寶),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다.

3보 중 으뜸은 불교의 근본인 부처를 모신 불보, 통도사다. 자장율사가 사리를 가장 먼저 봉안한 곳이 바로 통도사다. 일주문과 금강문, 불이문을 차례로 지나면 좌우로 품위있는 모습의 건물과 탑이 줄을 잇는다.

적멸보궁은 정면에 서 있다. 사방으로 적멸보궁, 대웅전, 대방광전,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금강계단 글씨와 일주문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오대산 적멸보궁(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 아래 천혜의 터가 있다. 적멸보궁은 그 아름다운 터에 서있다.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이 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덕에 우리나라 스님은 먹을 것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다. 월정사에서 비포장길로 8㎞를 오르면 상원사.

적멸보궁은 상원사에서도 2㎞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짧은 거리이지만 땀을 쏙 뺀다. 봉분처럼 생긴 언덕 위에 자리한 적멸보궁은 화려하지 않고 단아하다. 불자의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사자산 법흥사(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사는 불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이 문을 열고 위세를 떨쳤던 사찰이다.

1912년 산불로 소실됐고 17년의 중건불사를 마치자마자 1931년에는 산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39년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명맥을 유지하다가 옛 모습을 회복해가고 있다.

가장 최근에 중수된 적멸보궁이어서인지 5대 적멸보궁중 화려한 단청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운치는 떨어진다. 궁 뒤로는 자장율사가 기도하던 토굴이 있고 그 옆에 사리를 넣어왔다는 석함이 남아있다.


설악산 봉정암(강원 인제군 북면)

5대 적멸보궁중 일반인의 참례가 가장 어렵다. 설악산 소청봉의 거의 꼭대기인 해발 1,244m의 험한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불자보다는 등산객의 차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은 백담계곡에서 시작된다.

백담사 입구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는 걸어서 약1시간30분. 봉정암은 백담사에서 다시 6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자장율사는 왜 이렇게 험한 곳에 보궁을 지었을까? 힘든 끝에 짜증도 나지만 보궁에 다다르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수행 뒤에 얻는 득도의 기쁨.

봉정암 적멸보궁은 간단하게 그 진리를 일러준다.

권오현 생활과학부 차장

입력시간 2000/12/26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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