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판 깨지려나?

"먼 훗날 프로야구사를 정리할 때 선수협 파동은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석에서 만난 한 야구인은 최근 전개되고 있는 프로야구선수협의회(회장 송진우) 파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1982년 군사독재정권의 부산물로 탄생한 프로야구가 선수협 파동으로 출범이후 최대의 시련을 맞고 있다.

선수협과 구단의 힘겨루기가 좀처럼 끝날줄 모르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정말 프로야구판이 깨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선수협 파동의 시발점은 1999년 9월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서울에서는 시드니올림픽 예선 겸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국내 프로야구는 시즌을 중단하면서 프로선수들을 출전시켰다.

일정기간 특정구단에서 활동한 선수에게 타구단으로 이적을 허용하는 자유계약선수(FA)제가 처음으로 도입돼 선수들의 관심이 온통 FA제에 쏠려있을 때였다.

하지만 사장단들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FA제는 개악에 개악을 거듭했다. 이를 계기로 국가대표선수로 뽑힌 머리 큰 스타급선수들이 "이대로 당할수 없다"며 선수협을 구상하게 된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 선수협 구상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은 그해 11월 일본에서였다. 6일부터 일본에서 열린 한ㆍ일 슈퍼게임에 참가한 8개 구단 간판급 선수들이 비밀리에 모여 "한번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달여가 지난 12월15일.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끝난후 수십명의 8개 구단 간판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체육담당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던 권시형(35) 박사가 이들에게 규약의 불공정성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갔다. 운동 외에 규약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선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당연지사였다.

이후 8개 구단은 주장 주재로 모임을 갖고 선수협 출범의 당위성을 이해하고 선수협 결성에 적극참여키로 결정한다.

선수협 파동이 불거졌을 때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구단에 의해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권시형 박사와 스포츠매니지먼트회사인 SM1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들이 선수협과 관련을 맺게된 배경을 두고 아직까지 설이 분분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양준혁(LG)이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는 게 정설이다.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과 출신들로 구성된 SM1과 에이전트계약을 했던 양준혁이 선수협 출범을 위해 자문을 구한게 계기가 됐다.

SM1측은 대학교 선배이자 집권당 체육담당 전문위원이던 권시형 박사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권 박사는 규약을 검토한후 공정거래위에 법적인 검토를 부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급해진 구단, 선수들 각개격파

선수협 결성 움직임이 구단에 의해 탐지된 것은 12월말께. 삼성과 해태에 의해서였다. 다급해진 구단은 소속선수들을 대상으로 각개격파에 나섰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선수들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 구단의 전횡으로 제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터라 요지부동이었다. 선수협 주축멤버들이 D데이로 잡은 것은 올 1월21일이었다.

총회 하루 전날까지도 집회장소를 비밀에 부쳤다. 21일 저녁 63빌딩 대회의장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8개 구단 관계자들이 진을 치며 소속선수의 입장을 막았다.

하지만 선수협 가입은 대세였다. 8개 구단 선수 300여명이 모였으나 삼성의 주장 김기태와 LG주장 유지현의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삼성 선수들이 철수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2일 새벽 선수협은 75명의 선수가 발기인으로 참가한 가운데 총회를 열었다.

사장단들은 긴급이사회를 열어 선수협인정 불가를 천명한 가운데 시민단체들이 속속 선수들을 지지하고 나서는 등 사회적 문제로 확대됐다. 지리한 힘겨루기는 3월10일에 끝났다.

문화관광부가 중재에 나서 5개항의 합의를 이끌어내 선수협 파동은 일단락됐다.

△선수협은 2000시즌 종료 후 결성한다 △집행부는 시즌종료후 선출한 구단대표로 한다 △선수협 선수들은 시즌중 활동을 중지하고 소속팀에 복귀, 야구활동을 한다 △구단 및 KBO는 선수협 선수들에게 일체의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제도개선위를 구성한다는게 합의사항이었다.


구단, 선수협 핵심멤버 방출 자충수

잘 풀릴 것같던 선수협 파동은 지난해 12월18일 또다른 전쟁을 시작했다. 15일 8개 구단 주장이 만났지만 의견합의에 실패, 선수협 출범을 지지하는 6개 구단 대표들이 참가한 총회를 열었다. 참여선수는 고작 29명. 대세는 구단편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자 사장단들은 강수를 뒀다. 6개 구단 대표로 선출된 송진우(한화) 양준혁(LG) 심정수(두산) 마해영(롯데) 박충식(해태) 최태원(SK) 등 6명을 자유계약선수로 방출시키며 보류권 포기를 선언해버렸다. 이들 6명은 더이상 프로야구선수로서 자격을 유지할 수 없도록 하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잠잠하던 다수의 선수들은 분노했고 속속 선수협에 가입했다. 신인을 제외한 357명의 보류선수 중 200여명 이상이 가입,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같던 선수협 파동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이에 구단사장들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는 한 선수협을 인정할수 없다"며 "내년 시즌 프로야구를 중단할 수도 있다"고 초강경입장을 고수했다.

선수협도 "단체훈련을 거부하겠다"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으로 맞대응했다.

대화는 없고 서로를 헐뜻는 말싸움이 이어졌고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번 파동의 핵심은 선수협의 사단법인화 문제다. 구단측은 노조의 전단계인 사단법인체로 선수협이 출범하는 것은 묵과할수 없다는 입장이고 선수협은 구단의 전횡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단법인화는 피할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단법인화 문제가 파동의 핵심

사장단이 사단법인화를 반대하는 구체적 이유는 외부세력이 대리인제도를 통해 구단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때문이다. 또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구단이 선수들이 구성한 압력단체인 선수협과 대등한 입장이 되는 게 마땅치 않은 점도 있다.

선수협은 "그동안 제도개선위를 통해 구단에게 불합리한 규약개정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단 한번도 수용된 적이 없다"며 사단법인화만이 이해를 관철시킬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극적인 타협이 없는 한 자칫 올시즌 프로야구가 중단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KBO측은 각 구단이 전지훈련을 떠나는 1월 중순이나 올해 연봉을 지급하는 시점인 1월 말께가 타협의 시기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을뿐이다.

정연석 체육부 기자

입력시간 2001/01/03 19:53


정연석 체육부 yschu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