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의 세계] 난

김덕수(45ㆍ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씨 집 베란다는 한겨울인 지금도 온통 푸른빛이다. 베란다를 가득 메운 난 때문이다. 그가 난실(蘭室)이라고 부르는 공간에는 600여개의 난분(蘭盆)이 있다. 모두 다른 종류로 13년 전부터 모은 것이다.

김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난 마니아다. 그는 난 마니아를 "난이 생활의 최우선 순위에 있어야 하고, 일정 정도의 돈을 난에 투자해야 하며, 난에 관한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그 자신 역시 "PD로부터 당장 원고를 보내지 않으면 잘라버리겠다는 독촉이 들어와도 난에 물을 주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고, 난이 걱정이 되어 오래 집을 비우지 못한다"고 한다.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아침에 일어나서, 퇴근하고 돌아와서, 그리고 자기 전에 난실에 들어가 난을 돌본다.

그렇게 많은 난이지만 어떤 난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무슨 상태인지 눈을 감고도 헤아릴 수 있다. 집을 비운 사이에 부인이 조금만 방향을 바꿔놓아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몇년 전 지금 집으로 이사올 때 가장 먼저 고려한 것도 베란다의 넓이와 방향이었고 이사 전날에는 꼬박 하루가 걸려 수백개의 난을 하나하나 알루미늄 호일로 싸서 날랐다.

그가 모은 난은 값으로 따지면 당연히 재산목록 1호에 올라갈 정도. 또 난실의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온풍기와 팬, 난을 돌보기 위해 구비한 각종 약품을 마련하는 데도 돈이 들었다.

그의 집 책장에는 난 관련 서적과 각종 자료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국내에 나와있는 웬만한 책은 다 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물론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어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다.


색깔 무늬등에 따라 수천가지

그가 난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맡게 된 난향(蘭香) 때문이었다. 어느날 아는 사람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낯선 향기에 사로잡혔다. 마치 맑은 느낌의 향수를 뿌린 아름다운 여인이 스쳐지나가기라도 한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집 주인에게 난에서 나는 향기라는 설명을 들은 그는 그 길로 난을 얻어 돌아왔다. 몇년 전 선물로 받은 난을 무심히 다뤄 몇번 죽인 적이 있던 터라 이번에는 제대로 키워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이후 그는 점차 난에 빠져들었다.

난은 키우면 키울수록 오묘한 화초였다. 김씨의 말을 빌면 "주인에게 아양을 떠는 식물"이다. 다년생초인 난 한촉의 수명은 대개 5~7년. 수년간 정성을 들여야 작품이 나온다. 같은 화분에서 갈라져 나와도 기르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기르는 사람이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이를 알기라도 하듯 어딘지 품세가 다르다. 그럴 때는 꼭 사람 같다. 또 처음 볼 때는 다 같은 줄 알았는데 종류가 천차만별이었다.

일반적으로 난은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란(春蘭), 하란(夏蘭), 추란(秋蘭), 한란(寒蘭)으로 나뉜다. 또 한대에 여러 개의 꽃이 피는 난을 혜란(蕙蘭)이라고 하고 나무나 바위에 붙어 기생하는 난은 풍란(風蘭)과 일명 석곡이라 불리는 장생란(長生蘭)으로 나뉜다.

각각의 종은 꽃의 생김새나 색깔, 잎의 형태와 무늬에 따라 수천가지다. 같은 동양란을 키우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난의 족보도 있다. 더러 한 종에서 기존 모양과 다른 변이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난 문화협회나 난 등록협회의 심사를 거쳐 새 품종으로 등록할 수 있다.

이때 이름은 주인이 붙일 수 있고, 이런 새 변이종을 만나는 건 김씨 같은 난 마니아에게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몰아지경'경험

그는 난의 매력을 한마디로 설명하지 못한다. 종류만큼이나 여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시사철 푸르른 자태는 옛 사람이 말하듯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의 모습 그대로 고고하다.

또 한없이 자랄 듯 하다가도 결코 과함이 없이 어느 선에서 성장을 중지하는 모습에서는 소박함을, 우아하면서도 날렵한 곡선을 자랑하는 잎이 큰 것과 작은 것, 서 있는 것과 누운 것이 어긋남 없이 조화를 이룬 모습에서는 어우러짐을 배운다.

그런가 하면 난은 여성적이다. 빨강, 노랑, 하얀색 등의 꽃도 아름답지만 향은 더욱 일품이다. 난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춘란과 한란은 머리 속이 상쾌해지는 듯한 청향(淸香), 혜란의 일종으로 잎이 넓고 큰 보세란의 경우는 매콤한 향, 그리고 풍란은 달콤한 감향(甘香)을 낸다.

그런 난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으면 김씨는 머리 속에 있던 온갖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한다. 때로는 몰아지경(沒我之境)을 경험하기도 한다.

김씨의 난사랑은 1998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유니텔 동호회 난마을에 가입한 것. 난마을은 1997년 1월 유니텔 동호회 원예방에서 만난 이성묵(대신전자통신주식회사 상주 1팀 과장)씨 등 난 마니아 몇명이 만든 최초의 PC통신 난 동호회.

지금은 전국 6개 지부에 대학생 이상의 순수 아마추어 회원 600여명이 가입해 있다. 40대가 주축이며 남자 회원이 전체의 90%다. 그들은 스스로를 '애란인'(愛蘭人)이라 부르고 서로는 난우(蘭友)라고 부른다. 회원 중 상당수는 김씨처럼 선물로 받은 난을 죽인 경험에서 난 사랑을 시작한다.

김연준(이코인 이솔루션사업팀 전임연구원)씨는 "형이 산에서 캐온 난을 서울 집에 가져왔다가 죽인 후 마음이 찜찜했어요. 그래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임에 가입했지요"라고 한다. 서양란을 키우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개는 동양란을 기른다.

김상일(SBS 아트텍 영상제작팀 차장)씨는 "서양란이 동양란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꽃이 지면 볼 품이 없는 서양란 보다는 언제 보아도 볼거리가 있는 동양란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각 지부별로 매달 1번씩 모임을 갖는데 수도권 지부의 경우 60여명 정도가 모인다. 정기적으로 세미나도 하고 난 경매도 실시하는데 경매 때는 증식에 성공한 난 주인이 상한가를 정하고 거기에 가장 근접한 입찰가를 써낸 사람에게 난을 준다.

차익금은 모임 운영비로 쓰인다. 물론 가까운 사람끼리는 거저 난을 교환하기도 한다. "난우들 사이에는 내 것 네 것이 없다"는게 난마을 사람들의 얘기다.

또 홈페이지(www.cyberorchid.co.kr) 게시판에 올린 난우들의 글을 모아 벌써 4권의 난담(蘭談)도 냈다. 정기 모임이나 공식적인 행사 외에 수시로 번개 모임도 갖는다. 3~4시간 정도 걸리는 모임의 절반은 모두 난 얘기다.

가끔 술도 먹는데 이때 난에 꽃이 피었으면 향을 방해하지 않도록 냄새가 없는 안주만 먹는다.

겨울에는 한란의 꽃잎을 따 30분 정도 소주에 띄웠다가 먹는 운치도 부린다. 난향이 소주의 역한 냄새를 없애준다. 또 하루에 한번 이상은 회원중 누군가에게 쪽지를 보내 난 이야기를 나눈다.

농심연구소에 근무하는 최경부씨는 "난우들과는 만난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날마다 난 얘기를 해서인지 지금은 고등학교 친구들보다 더 친해졌다"고 한다. 모임 초기에는 난을 캐러 가는 산채여행도 갔지만 야생란 보존을 위해 이제는 자제하고 있다.


사랑 정성 쏟다보면 마음의 평화 얻어

난마을에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두달 전 가입해 이제 겨우 3개의 난을 기르고 있다"는 김복희씨같은 초보자들이 많다. 물론 마니아의 경지에 오른 사람도 있다.

고영철(마인 디자인 대표)씨는 "퇴근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족보다 먼저 난을 들여다본다. 또 사람들에게 실망했을 때 난을 들여다보면 보상받는 기분"이라고 한다.

김상일씨도 "자다가도 일어나서 난이 잘 있는지 볼 때가 있다. 이제는 출장가서 집에 전화하면 묻지 않아도 식구들이 먼저 난 잘 있다고 해줄 정도"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김씨는 단연 중증 마니아다. 난분의 수만 봐도 보통 마니아의 100~200개보다 3배 이상 많다. 자연히 그는 매달 있는 경매에 빠지지 않고 난을 낸다.

또 난 지식 및 각종 약품을 많이 구비한 탓에 기르던 난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홈페이지 '도와주세요'코너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는 것도 그다. 이성묵씨는 "언젠가 제 난이 아파서 글을 올렸더니 김 선생님이 바로 다음날 약품을 가지고 제 회사 앞까지 찾아오신 일도 있다"고 일러주었다.

지난해 9월부터는 3기 대표 시삽을 맡고 있는 김씨는 "오프라인에는 이미 수천개의 난회가 있지만 온라인 상에는 아직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빠르고, 언제든지 접속해 난에 관한 정보를 나눌 수 있으며 난에 관한 각종 정보와 글을 볼 수 있는 온라인 동호회야 말로 난 마니아에게 대단히 유용하다"고 자랑한다.

난을 보며 가지는 느낌은 저마다 다르지만 매번 모임마다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그것은 난에 대한 사랑, 난을 기르는 정성, 그리고 난을 보는 갖게 되는 마음의 평안함 같은 것들이다.

김씨를 비롯한 난마을 회원은 벌써 봄을 기다린다. 화분 속 작은 흙더미로부터 빼꼼히 고개를 내밀 투명한 새 촉과 겨우내 눈에 밟혔던 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을지도 모른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난에 관한 잘못된 상식들

난은 흔하지만 만만히 않은 화초다. 난분 하나 없는 집도 드물지만 난 한번 죽여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정도다. 그래서 난은 일반적으로 기르기 힘든 까다로운 화초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난 마니아들은 "난은 선인장만큼 기르기 쉽다"고 말한다. "난을 죽이는데 3년이 걸린다"는 속담도 있다고 한다. 난마을 회원들의 도움말로 난에 대해 잘못 알려진 점과 바로 알아야 할 점을 짚어본다.

◇난은 비싸다=난은 종류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촉에 1억원이 넘는 것도 있지만 1만원 대 이하의 저렴한 종류도 많다. 비싼 것은 그만큼 희귀하기 때문이고 좋은 난이기는 하지만 가격이 난의 아름다움을 평가해주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또 난을 기르다 보면 사람마다 취향이 생기므로 굳이 가격에 구애받을 필요없다. 단, 마대 자루에 산에서 채취한 난을 하나 가득 담아놓고 길에서 마구잡이로 파는 난은 원예가치가 없으므로 사지 말아야 한다.

◇난은 일반 화초들처럼 자주 물을 주어야 한다=일반인이 난을 죽이는 제일 첫번째 이유는 과보호. 난은 마니아들이 "식물중에서 가장 진화한 종류"라고 말할 정도로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고 뿌리 부분이 스폰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쌓여있어 물을 저장하므로 물을 자주 주면 뿌리가 썩어죽는다.

다만 난의 상태와 난이 자라는 조건에 따라 물주는 간격을 터득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화분 맨 위의 난석이 하얗게 마르면 2, 3일 후 주면 된다.

◇난은 겨울에는 무조건 따뜻한 곳에 두어야 한다=난은 아열대 식물이긴 하지만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성장을 멈추고 휴면에 들어간다.

이때는 영하 3, 4도 정도까지는 얼어죽지 않는다. 오히려 난방으로 10도 이상 되는 후끈한 실내가 난에게는 더 좋지 않다. 그러므로 아주 추운 날씨가 아니면 겨울에도 베란다에 놔두는 것이 난을 더 튼튼하게 만든다.

◇난은 햇볕과 담배연기를 싫어한다=난도 다른 식물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햇빛을 보고 광합성 작용을 해야한다. 단, 너무 뜨거운 햇볕은 잎 표면의 숨구멍을 막아버리므로 좋지 않다. 특히 한여름에는 베란다에 블라인드나 발을 쳐 반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또 베란다에 난이 있으면 담배를 못 필 것이라는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난은 담배연기에 그다지 영향받지 않는다. 대신 바이러스가 옮을 수 있으므로 담배를 피고 난 다음에는 손을 씻고 난을 만지는 것이 좋다.

◇좋은 게 좋은 거다=난을 기르는데 있어 만병통치약이란 없다. 무엇무엇이 좋다는 다른 사람의 경험은 참고로 하되 맹신하지는 말아야 한다. 난은 기본적인 것만 해주면 알아서 크므로 성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오히려 난을 죽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만일 그래도 난에 문제가 있다면 일반 화원 대신 난 전문점을 찾아가야 한다. 난 전문점은 전국적으로 600여 곳이 있으며 일산 근교나 양재동 등 큰 화훼 단지에는 반드시 한두군데 있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1/09 21:01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