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도 'NO' 할 수 있다

금융권 잇다른 '마이웨이' 선언, 관치금융 형태 대변혁 예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정부의 금융정책과 달라도 그 길을 포기할 수 없다"는 금융기관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마이웨이 은행'들. 관치금융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없는 우리 금융풍토에서 마이웨이의 고수에 따른 불이익이 적지 않을 것이지만, 자율을 외치는 은행의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1차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외국자본에 넘어갔거나, 외국자본이 대주주인 은행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마이웨이 현상이 금융계에 어떤 바람을 불러올지, 그리고 향후 정부 당국의 금융정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 관심의 대상이다.

마이웨이를 부르짖는 대표적인 곳은 역시 1년전 미국계 펀드에 팔려, 일본계 미국인인 윌프레드 호리에 행장이 맡고 있는 제일은행. 제일은행은 호리에 행장 취임후 주주와 은행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따지는, 기존의 우리 은행 행태와는 다른 모습을 적지 않게 보여왔다.

그래서 금융계에서는 제일은행이 언젠가는 금융감독원과 크게 한판 붙을 것으로 예상했다. 은행은 자체 수익이나 건실한 운영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데, 금융감독원은 전체 금융시장의 흐름을 생각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입장이 상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은행, 회사채인수 방안에 반기

그런 우려는 새해 벽두부터 현실로 나타났다. 제일은행이 최근 비우량 기업 회사채의 인수 여부를 둘러싸고 금융감독원과 벌인 신경전이 그것이다.

금융감독당국과 개별 시중은행이 정부정책을 둘러싸고 정면으로 대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어서 금융 관계자들은 그 결과에 관심을 쏟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제일은행의 판정패다.

과정은 이렇다. 금감원은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비우량기업의 회사채 80%를 산업은행이 먼저 인수한 뒤 이 물량중 20%를 채권은행이 재인수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 회사채는 IMF시절 발행한 것이라 그 액수는 무려 65조원에 달한다.

올해 국민총생산의 15% 수준. 그래서 진념 재경부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서 보충설명을 통해 "투신 등 제2금융권의 회사채 중개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면서 강제조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제일은행은 자신에게 배정된 회사채 인수(20개 채권은행이 균등하게 나눌 경우 약 5,000억원)를 거부했다. 20여개 채권은행 중 유일하게 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은행의 자율을 무시한 강압적 조치이며 은행의 재무 건전도나 수익구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제일은행측의 설명이다.

외국계 금융기관과 학계에서는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크레디리요네(CLSA) 증권은 "산업은행이 올해 만기도래하는 비우량 회사채의 80%를 인수토록 한 조치는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는 단적인 예"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금감원은 발끈했다. 금감원은 "1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기관(제일은행)이 기업자금난 완화대책에 너무 비협조적"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다른 채권은행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제일은행 목조르기에 들어갔다.


정부 목조르기로 일주일만에 백기

첫번째 조치가 은행의 경영실태평가(CAMELS)에 공공성 항목을 새로 포함시키기로 한 것이다.

CAMELS는 은행 경영실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자본의 적정성, 자산건전성, 경영능력, 수익성, 유동성, 위험관리능력 등 6개 항목을 평가한 뒤 등급이 일정 수준 이하인 경우 적기시정조치를 내리는 등 향후 은행감독의 주요자료로 이용된다.

또 제일은행의 주거래기업인 SK 등이 주거래은행 변경신청을 하도록 적극 유도하고, 11ㆍ3 부실기업 퇴출조치 때 제일은행이 회생가능한 기업으로 분류한 기업이 향후 유동성 위기를 겪을 경우 다른 채권 금융기관의 지원을 중단하는 방안도 마련하기로 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제일은행측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제일은행의 주거래기업 중에는 회사채 상환문제가 당장 심각한 곳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은행은 1주일만에 백기를 들었다. 호리에 행장은 1월10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금감원을 방문,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현대전자의 수출환어음(D/A) 한도 확대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튿날 제일은행측은 "현대전자가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D/A한도 확대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채권단에서 제일은행에 분담토록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액 수용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분담금액은 현대전자 수출환어음 매입한도(14억~15억 달러)중 3,800만 달러(약 456억원) 정도. 제일은행은 금감원과 대립했던 회사채를 인수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그럴 경우 자칫 정부강압에 의한 결정이란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회사채 분담은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회사채 대신 D/A 인수형식을 통해 정부정책에 동참한 셈이지만 이번 사건은 금융당국에 바뀐 금융환경을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는 평이다.


한미은행, 합병거부로 정부정책에 역행

제2차 금융구조조정 논의과정에서는 한미은행이 정부정책에 역행하는 길을 택했다.

금융구조조정의 핵심인 하나은행과의 합병을 거부한 것이다. 한미은행의 최대주주인 칼라일 그룹측은 9일 "지난해 12월 유력 컨설팅회사를 통해 한미ㆍ하나은행간 합병문제를 검토한 결과 부정적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사실상 합병포기를 선언했다.

김병주 칼라일그룹 아시아지부장도 "하나은행과의 합병은 시너지 효과가 없으며 주식가치가 올라갈 것으로 보기도 힘들다"는 의견을 내놨다.

물론 신동혁 한미은행장은 여전히 "칼라일은 한미은행에 출자할 때 금융구조조정에 협조한다고 정부에 약속한 바 있다"고 말하지만 합병의 기준이 우리 정부와는 다르다.

정부는 우량은행이면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한미은행이 국민ㆍ주택은행 합병과는 달리 하나은행과 자율적으로 합병하는 모범을 보여주기를 기대했으나, 칼라일 그룹은 합병후 은행의 내재가치, 다시 말해 합병후 주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합병후 주가가 오르지 않으면 정부가 등을 떠밀어도 합병을 하지 않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인 것이다. 마이웨이 은행의 등장으로 금융권의 자율경영은 이제 막이 오르고 있다. 시험대에 오른 금감원의 관치금융 행태는 조만간 어떤 형식으로든 바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1/1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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