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중구 소공동 원구단(圓丘壇)

조선조 말엽인 1897년 10월12일 고종(高宗)은 한성 한가운데인 소공동에 새로 쌓은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皇帝)로 즉위한다는 사실을 하늘에 알리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올렸다.

다음날인 13일에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위(帝位)에 오른 것과 국호를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명나라 연호를 쓰던 것을 자국년호인 '광무'(光武)로 정했음을 선포했다. 이어 14일에는 이 사실을 각 나라 공사관에 통보했다.

조선왕조 역사 이래 최초로 중국에 고명사신을 보내 굳이 승인을 받지않고 하늘에 직접 아뢴 뒤 제위에 올라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한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국 주위에 열강들이 좌충우돌하는 판국에 굳이 이웃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이제 우리도 자주독립국임을 당당히 선포한 쾌거였다. 이전에는 중국의 천자가 아닌 조선국왕은 직접 하늘에 제사지낼 권한도 없었다.

고천지제에 앞서 고종은 길지를 골라 원구단을 쌓을 것을 지시했다. 지관이 찾아낸 '해좌사향'(亥坐巳向)의 길지가 바로 오늘의 소공동 조선호텔 일대였다. 태종(太宗)의 둘째 딸 경정공주의 집터로, 뒷날에는 선조(宣祖)의 셋째 아들 의안군의 별궁이 들어섰던 곳이다.

또 임진왜란 뒤 한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거처가 되었다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남별궁을 두었던 자리가 됐다.

고종 임금은 광무 원년, 곧 1897년 10월12일 오전 2시에 장엄한 위의를 베풀고 많은 관원, 군민, 백성을 거느리고 경운궁(慶雲宮:지금의 덕수궁)에서 원구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하고 황제 위에 나아감을 고하고 오전 4시반에 환어했다.

"원구단은 이전 남별궁 터뎐에 단을 모앗난대 일흠은 원구단(園丘壇)이라고도 하고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난데.. 단이 삼층이라.

맨 밋해 층은 장광이 영척으로 일변 사십사? 가량인데 둥글게 돌노 싸셔 석자 길억지 놉히를 싸았고.. 바닥에난 모도 벽돌을 깔고 맨 밋층가으로는 둥글게 석?을 모으고 돌과 별돌노 담을 싸앗스며 동셔남북으로 황살 문을 하여 샛난데 남문은 문이 셋이었다"고 당시 '독립신문' 광무원년 10월12일자는 쓰고 있다.

이 명당에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는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원칙에 따라 원단을 쌓고 12층계를 만들었다. 주위는 세겹으로 토담으로 둘러쳤다.

그러나 하늘만 제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윗단에는 가장 상위에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를 모셨거니와 거기에 더하여 '황지지위'(皇地祗位), 그리고 '태조고황제위'(太조高皇帝位) 삼위를 모시고 가운데 단에는 '태명위'(太明位:해)와 '야명위'(夜明位:달), 아랫단에는 '사독'(四讀), '대천'(大川), '사토'(司土)까지 12위를 모셨다.

또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돌북(石鼓) 3개로 된 석고단도 만들었다. 이 원구단은 공적인 제사대상을 망라한 국가의 제단이며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나타내는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성한 제단을 일제가 그냥 놓아둘 리 없다. 1913년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을 지었다. 광복 뒤 철도호텔이 조선호텔로, 다시 지금은 고층의 웨스턴 조선호텔로 바뀌어 있다.

그 뒤편에 신위들을 모셔두던 황궁우(皇穹宇)만 덩그렇게 남아 고층빌딩에 갇혀 질식할 것만 같다. 하늘만 겨우 둥글게 빠꼼히 쳐다뵈니 원구단의 '원'(圓)자를 탓하랴! 역사여, 세월이여!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1/01/16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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