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스타열전 (45)] 이지디지탈 이영남 사장(下)

이영남 사장이 진실된 마음으로 구축한 휴먼네트워크는 IMF 위기에서 또한번 위력을 발휘한다. 3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해외인맥이었다.

당시 서현전자(이지디지탈)는 에어컨용 콘트롤러를 에어컨 전문업체인 만도기계에 납품하고 있었는데, 한라그룹의 부도로 만도기계가 문을 닫자 당장 자금줄이 막혀버렸다.

물린 납품대금만도 10억원대. 하청업체의 설움을 곱씹으며 이 사장은 관련 정부 부서와 주요 거래처 등을 찾아다니며 눈물로 호소했으나 어렵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이 사장은 외국 바이어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회사의 부실과 상관없이 부도 도미노 현상에 빠진 한국적 특수성을 설명하고 선(先)지급 후(後)납품을 부탁했다.

"마음으로 신뢰를 쌓아두면 역시 죽어라는 법은 없지요. 편지를 보냈더니 즉각 한국으로 날아와 용기를 잃지 말라며 제품 값을 미리 주기도 하고, 그냥 돈만 부쳐주신 분도 있고, 어떤 바이어는 전화로 격려해주더군요. 그게 휴먼네트워크죠.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니 수출에 따른 환차익이 커 그 일부를 바이어들에게 되돌려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은 미시즈 리의 행운'이라며 사양했어요. 고마운 분들이지요."


계측기분야서 세계적 마당발

고비 때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민 휴먼네트워크는 이 시장이 구축한 가장 큰 무기이자 장점. 그렇다고 어려운 점이 없을까? "회사 사업을 IT 멀티미디어쪽으로 돌린 뒤 구체적인 사업방향을 잡고, 뉴테크놀로지(신기술)를 확보하고, 타이밍을 잡는 게 어렵다"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계측기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적으로 마당발로 소문난 이 사장이다. 미국의 시어스로벅, 라디오 샤크사, 독일 콘래드 일렉트로닉스, 영국 로빈 일렉트로닉스, 프랑스 쇼방 아르누사, 일본의 히타치덴시 교리쓰 등과 거래가 활발하다.

수출대상국도 40여개국에 이른다. 놀라운 점은 이들 대부분이 그녀의 발품에 의해 개척됐다는 것이다. 집안살림(관리)은 부군에게 맡기고 국내외 영업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챙겼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산학 공동개발과 전략제휴, 아웃소싱 등에도 적극적이다. 스스로 네트워크 장비 제조사인 미 ADC사의 포틀랜드 공장을 방문하는 등 적극적 노력을 통해 제휴선을 하나씩 확보했다. 또 서울대 연구센터와의 산학 공동개발 등을 통해 기술개발 역량을 넓히기도 한다.


완벽한 생산설비 갖추고 상품성에 승부

이 사장이 휴먼네트워크와 함께 이지디지탈의 강점으로 꼽는 것은 거의 완벽하게 갖춰진 생산설비다. 그 이유가 독특하다.

"제조라인을 갖추고 있으면 큰 힘들이지 않고 기술습득은 물론 영업력도 생긴다"는 것이다. "파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후 서비스도 중요하기 때문에 내 것을 갖고 시장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게 그녀의 지론이다.

그런 탓인지 이지디지탈은 '코스트 리더'(생산원가 부문의 최고)와 '머칭다이징 리더'를 목표로 내걸고 있다. 머칭다이징 리더란 고객이 원하는 것을 상품화하는 능력에서 최고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어떤 상품이든 기술력은 대개 95% 정도로 비슷하고, 나머지 5%의 상품성에 따라 시장이 좌우되지요. 우리는 바로 5%의 상품성에 승부를 걸고 있다"고 설명했다.

회사의 상품력 제고는 거의 그녀의 몫인 듯 하다. "전문 엔지니어도 아닌 사장이 어떻게?"라는 의구심이 들지만 숱한 가시밭길을 걸어온 경험과 선진 마케팅 기법을 배운 노하우가 그녀에게는 있다고 한다.

"상품화 단계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술을 갖고, 그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 플러스 요인인데, 우리는 생산설비를 갖추고 있어 언제든지 남의 기술을 이용하고, 그것을 상품화할 수 있지요."

가끔은 여성 사장의 특혜도 누린다고 했다. "여성 사장으로서 희소성이 있다 보니 좋은 대접도 가끔 받기도 하지요.

또 학연 및 지연 등으로 얽혀있는 남성의 세계에서 중립적 존재로 쉽게 낄 수 있는 특혜(?)도 있고요." 그러나 성차별의 문화, 나아가 남성 위주의 사회관행을 뛰어넘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여기에는 그녀의 장기이자 여성만의 강점인 사교성이 동원된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정장을 하고 점잖아지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편이다.


직원과 기업이 함께 하는 벤처되어야

남부럽지 않는 제조설비에, 기술력까지 갖췄는데도 그녀는 벤처형 기업을 고집한다. 나눔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벤처마인드 때문이다.

이 사장은 1997년 이민화 메디슨 회장과 공적인 일로 어울리면서 벤처마인드를 전수받았다. "회사 덩치만 키우던 대기업 중심의 경제에서 이제는 직원도 기업과 함께 크는 벤처형 경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앞날이 암담하다"는 주장도 그때 깨달은 것들이다.

인터뷰 말미에 한동안 자금난으로 어려웠던 메디슨의 이민화 회장이 화제에 올랐다. 그녀에게 이 회장은 벤처마인드를 심어준 장본인.

그래서 인간적인 연민이랄까, 애틋한 정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언론이나 정치권에 어떻게 보였든 이 회장은 벤처산업의 대부입니다. 그런 사람이 클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조금만 어려우면 등을 돌리는 사람들의 매정함에 가끔 쓸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여성 경제인이기 보다는 존경받는 경영인이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여성 기업인이 너무나 적은 우리 현실에서 여성의 자존심을 지킬, 당당한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1/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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