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昌 "풀리나 했더니 역시나…"

구정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1월20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정국구상을 위한 잠행(潛行)에 들어갔다. 안기부 자금지원 사건으로 올 들어 내내 수세에 몰렸던 이 총재의 잠행은 정치권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 총재가 어떤 수를 내놓더라도 향후 정국의 향방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기 분명했기 때문. 잠행 9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총재의 선택은 뜻밖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 방문이었다.

이 총재의 상도동행은 안기부 사건을 돌파하기 위한 카드로 'YS와의 연대'를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총재의 선택은 단 하루만에 어그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열린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김영일 의원이 안기부 자금 사건의 'YS 책임론'을 제기하며 '결자해지'를 요구했기 때문. 이에 따라 모처럼 복원 조짐을 보이던 이 총재와 YS의 관계도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반昌 연대' 깨기위해선 YS 잡아야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내가 도와줬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험한 소리까지 들어가며 '불가근불가원의 대(對)YS 관계'를 고집해왔던 이 총재가 상도동을 찾아간 까닭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해석이 구구하다.

더구나 이 총재는 안기부 사건이 불거지자 마자 당 안팎에서 상도동을 방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시기가 좋지 않다"며 일축했던 터였다.

이 총재의 전격적인 상도동 방문은 일단 안기부 자금 사건 이후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 '3김1이'의 정국구도에 균열을 가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즉, DJ와 JP가 손을 잡고 YS가 느슨한 지지의사를 보이는 '반 이회창 연대'를 깨기 위해서는 YS를 고리로 삼아야 하기 때문. 2002년 대선까지 시간표 속에서 이 총재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3김이 연대, 자신을 포위해 오는 형국이다.

이 때문인지 회동 이후 이 총재측은 "안기부 예산이 신한국당으로 흘러들어와 선거자금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현 정국이 위기상황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면서 공공연하게 연대 가능성을 내비쳤다.

상도동 대변인 박종웅 의원이 "'도와달라'는 이 총재의 말에 김 전 대통령은 끝내 묵묵부답이었다"면서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이 총재측은 "앞으로 자주 만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이 총재측은 두 사람의 회동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여권의 안기부 자금 사건 공세에 제동을 거는 것도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안기부 사건이 불거진 후 "김대중씨의 정치 비자금 문제는 내가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말해왔다. 따라서 YS가 이 총재와 더불어 공동대응에 나설 경우 여권이 일방적인 우위를 보였던 안기부 자금 사건 공방의 형세가 바뀔 수도 있다.


김영일의원 "YS가 결자해지"

하지만 이 총재측과 상도동 사이에 모처럼 감돌았던 화기(和氣)는 29일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터져나온 김영일 의원의 발언으로 하루 만에 냉기(冷氣)로 돌변했다.

김 의원은 강 부총재의 '고백'을 전하는 형식으로 "문제의 1996년 총선자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닌 YS의 정치자금이며 강 부총재가 검찰에 나가지 못하는 이유도 YS를 물고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총재측은 즉각 "당지도부와 상의를 거치지 않는 돌출발언"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상도동의 분노를 달랠 수는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나에게 (안기부 자금 사건을)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라며 몹시 화를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대변인 격인 박종웅 의원을 통해 연일 "적과 동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여권의 야당파괴 음모에 놀아나고 있다"는 등 험악한 말을 쏟아냈다.

5, 6공 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과 수석을 지냈던 3선의 김영일 의원이 자신의 발언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짐작하지 못한 채 실언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인 관측.

오히려 김 의원은 당내 기류를 읽고 치밀한 계산 끝에 이 총재가 대신 매를 맞고 있는 안기부 자금 사건의 칼 끝을 YS에게 돌리기 위해 '사고'를 쳤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나라당 내에서는 안기부 자금 사건이 불거진 후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YS가 직접 나서서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 의원의 발언은 상도동의 거센 반발만 불러왔을 뿐 안기부 자금 사건의 책임소재를 YS에게 돌리는 여론몰이의 물꼬를 트는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YS 책임론'이 공식적으로 불거지면서 부산ㆍ경남 지역 출신 의원과 대구ㆍ경북 출신 의원이 감정 대립 양상을 빚는 등 내부 갈등조짐까지 엿보이는 상황이다.


이총재 그랜드플랜에 상당한 차질

한나라당이 상도동을 자극하지 않는 무대응 전략을 선언하고 김 전 대통령도 5일 6박7일 간의 일정으로 일본 외유에 오르면서 입을 다무는 바람에 김영일 의원 발언 파문으로 인한 양측의 신경전은 휴전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향후 대권정국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즉 이 총재가 다시 YS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할 것인지 여부가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 안팎에서는 양측이 예전의 어색한 사이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즉, 김 전 대통령이 부산ㆍ경남의 정치적 기반을 토대로 이 총재의 애를 태우며 대선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노리는 반면 이 총재는 자신에게 계륵과도 같은 존재인 김 전 대통령을 적당히 무시하되 적으로는 돌리지 않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과거 상황이 재연되는 것이다.

이 총재측 한 관계자는 "이 총재의 상도동 방문은 자민련 교섭단체 인정까지 포함한 그랜드 플랜의 하나였는데 앞으로 상당부분 수정이 불가피하다"면서 "과거처럼 YS의 영향력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 의원 발언 파문이후 대구ㆍ경북 지역, 수도권 지역 출신 의원들도 "더 이상 상도동에 목을 매지 말고,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뜩이나 이 총재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YS측도 이번 소동이후 이 총재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진 상황이라 좀처럼 마음을 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상도동 한 관계자는 "앞으로는 손을 내밀면서 뒤로는 뒤통수를 치는 이 총재의 이중적 행태가 그대로 드러났다"면서 "언제 다시 찾아올지는 몰라도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좋은 소리가 나오겠느냐"고 꼬집었다.

박천호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06 17:55


박천호 정치부 tot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