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이 움직인다"

민주당에서 원내총무 경선이 본격화되자 당장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뒤에서 누구를 밀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 됐다.

지난해 말 동교동계 2선 퇴진론에 밀려 스스로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그이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남다르다는 증거다. 다소 억측에 속하나 이번 총무 경선에서 동교동계의 구세력을 대표하는 권 전 위원과 동교동계 신세력을 상징하는 한화갑 최고위원이 다시 '양갑(兩甲) 격돌'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렇다면 권 전 위원의 총무경선 개입설은 그의 후광을 업고자 하는 특정 경선 후보가 그저 희망적인 기대를 피력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정치활동까지 접은것 아니었다"

최근 권 전 위원의 주변에서는 그가 정치적 역할 재개를 모색하고 있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가장 주목되는 것이 내외문제연구소의 재건 추진이다.

내외문제연구소는 원래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시절 만들었던 외곽단체다. 김 대통령이 정치 일선에서 손을 떼고 있었을 때는 권 전 위원이 대리인으로 관리하기도 했다.

이 연구소는 그러나 김 대통령이 정치에 복귀, 국민회의를 창당할 무렵에 해체됐다. 당시 해체의 명분은 계보정치를 청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권 전 위원이 내외문제연구소를 재건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권 전 위원의 한 측근 의원은 "권 전 위원은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것이지 정치활동까지 모두 접은 것은 아니다"라면서 "그의 정치적 역할 모색은 당연한 것이며 처음부터 예정된 수순"이라고 강조했다.

즉, 내외문제연구소의 재건은 권 전 위원이 본격적으로 정치행보를 재개하는 상징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이 측근의 설명이다.

연구소 재건 계획의 추진 정도에 대해서는 다소 엇갈린 얘기가 나온다. 이미 사무실 마련이 끝났고 3월중 개소를 목표로 인선작업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연구소 재건에 대한 권 전 위원의 최종 결심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따라서 연구소 재건 문제는 주변에서 심각히 논의되는 단계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

어떤 경우든 권 전 위원을 지지하는 당내 세력은 연구소 재건 문제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같은 적극성의 근저에는 권 전 위원이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있다.

또 권 전 위원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자파 세력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어야 앞으로 대선 국면에서 킹메이커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략적 포석도 포함돼 있다.

동교동계 인사중 권 전 위원과 함께 구주류를 대표하고 있는 김옥두 전 사무총장은 연구소 재건 문제에 대해 "연구소가 세워진다면 당의 뿌리를 지켜온 정통세력이 모두 함께 사심을 버리고 당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권 전 위원의 주변에서 나오는 이같은 말을 종합하면 역설적으로 계보정치의 탈피를 위해 해체됐던 연구소가 권 전 위원의 계파 정치를 위해 다시 재건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올 법 하다.


차기대선 역할론, 소장파 그룹선 비판적

연구소 재건 문제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김 대통령의 의중에 가장 민감한 권 전 위원이 반공개적으로 연구소 재건을 추진하는 것은 김 대통령의 묵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권 전 위원이 김 대통령의 의사에 반해 연구소 설립을 추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역으로 김 대통령은 여론에 밀려 권 전 위원을 퇴진시키기는 했으나 아직은 권 전 위원의 역할이 남아있고 앞으로 대선 국면에선 그 역할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더 자연스럽다.

권 전 위원의 한 측근은 "권 전 위원은 아직 당내 최대 세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면서 "때문에 김 대통령이 대선 국면을 관리하기 위해선 권 전 위원을 활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가 않다.

권 전 위원의 2선 퇴진론에 적극적이었던 한 소장파 인사는 "김 대통령이 권 전 위원의 정치적 역할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려 한다면 또다른 역풍을 맞을 것"이라면서 "권 전 위원의 퇴진 계기가 됐던 여러 문제점은 그가 정치적 역할을 재개하는 순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권 전 위원의 정치적 역할 재개 모색의 와중에서 흘러 나오는 권 전 위원의 '이사설'은 상당히 흥미롭다. 권 전 위원이 현재 살고 있는 평창동 집을 옮길 것이라는 얘기다. 그 이유는 터가 나쁘기 때문이다.

권 전 위원은 1992년 북한산 자락인 평창동에 이사를 와 한 동네에서 집을 한번 옮기기는 했으나 여전히 평창동에 살고 있다. 그런데 권 전 위원은 이곳에서 한보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는 곤욕을 겪었다.

또 이번엔 동교동계 2선 퇴진론이라는 정치적 파동 속에서 스스로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는 불명예를 겪어야 했다. 그래서 권 전 위원의 주변에선 "권 전 위원이 특별한 잘못이 없는데도 이런저런 정치적 희생을 감수해왔다"면서 그 이유를 "살고 있는 집의 터가 나빠서 그렇다"는 일종의 풍수지리에 연결시키는 농반진반의 얘기가 있어왔다.

같은 북한산 자락인 평창동ㆍ구기동에 살았던 최형우ㆍ서석재 전 의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현철씨 등이 원치 않는 불운을 겪었다는 점도 이들이 풍수지리를 더욱 확신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인지 최ㆍ서 전 의원과 현철씨는 현재 모두 이사를 가서 다른 곳에 살고 있다.


"터가 않좋아" 이사설도

권 전 위원의 이사설에 대해서 측근인 이훈평 의원은 "권 전 위원에게 안좋은 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얘기"라면서 "권 전 위원의 주변에는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사설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 측도 있다. 권 전 위원의 한 핵심 보좌역은 "권 전 위원의 부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전제, "권 전 위원이 미신 때문에 집을 옮긴다고 하면 아마 부부싸움이 날 것"이라고 귀띔했다.

여기엔 권 전 위원도 주변에서 답답해서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만큼 심약하지 않다는 얘기가 덧붙여진다.

그런데 만약 권 전 위원의 이사가 실현에 옮겨진다면 이는 권 전 위원측으로서는 '비상한 상황'이다. 그만큼 권 전 위원의 정치적 의지가 강렬하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면서까지 심기일전한다는 것은 곧 대선 국면에서 킹메이커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선긋기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주당 내에서 차기 주자군이 각개약진을 하면서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기 위해 암중모색하는 상황은 권 전 위원의 정치적 역할을 가능케 하는 좋은 공간이 된다.

<사진설명> 권노갑 전 최고위원 주변에 최근들어 정치역할 재개 움직임이 감지되며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최종욱/사진부 기자>

고태성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06 18:20


고태성 정치부 tsg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