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 싸움에 복터지는 소비자?

"환율이 올라 환차손에 따른 가격인상이 불가피합니다."- SK㈜(1월31일)

"가격 인상요인이 없으므로 현행 요금을 유지합니다."- S-OiL(2월1일)

정유업계의 '이단아' S-OiL이 또 사고를 쳤다. 거의 모든 정유사가 가격 인상을 전제로 오름폭을 저울질하던 상황에 가격동결(벙커C유는 인하)을 전격 선언한 것.

1, 2원을 다투는 석유제품의 가격은 - 며칠이나 지속될 지는 미지수지만 - 2월 들어 사실상 처음으로 정유사에 따라 최소 30여원의 차이가 나게 됐다. 물론 S-OiL의 도발이 처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여러 모로 심상찮다.


가격차별화 신호탄?

그간 정유업계는 원유가격이나 환율, 국제 석유제품 가격 변동 등을 근거로 매달 말일께 휘발유 등 석유제품 가격 조정요인을 파악, 다음 달 가격을 발표해왔다.

그리고 그 조정폭은 담합이나 한 듯 동일했다(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결과 정유사간의 담합 사실이 부분적으로나마 밝혀졌다).

하지만 메이커별 석유제품 가격이 비슷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제품 단가의 결정적 요소인 원유도입 단가가 같을 뿐 아니라 공정이나 유통망도 대동소이하고, 또 제품의 품질 차이가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어떤 회사가 가격을 얼마나 올리거나 내리더라도 최저가격으로 수렴하는, 이른바 '최저가격=기준가격'이 정유업계의 정설이었고 또 엄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매달 말일이면 정유사마다 S-OiL의 발표만 기다리며 신경전을 펴는 양상을 보였고, S-OiL 제품의 가격이 석유제품 가격으로 통용돼왔다. 공정위 조사가 시작된 이후 최근 들어 이 '질서'가 다소 흔들리는 양상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 미지수이기는 하나 적어도 기존 질서의 와해가 실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 석유제품 '가격차별화'의 가능성은 확인한 것이다.


이단아의 반란

S-OiL의 '이단 노선'은 후발업체로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정유업계 '빅4'의 석유제품 시장점유율 구도는 현대의 한화에너지 합병(1997년)이후 'SK, LG, 현대, S- OiL'의 순위가 미동조차 않는 형국.

SK 등은 OK 캐쉬백 등 맴버십카드를 통한 두터운 고객층을 무기로 한 서비스차별화를 통해 세(勢)를 확장하는 추세이고, 동특이나 타이거오일 등 수입사들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점차 시장점유율 경쟁을 본격화할 채비.

타이거오일은 지난해 말 자기 덩치(자본금 41억원)의 5배에 이르는 252억원 규모의 외자를 유치, 틈새전략 강화를 선포했다. 만년 4등으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S-OiL의 생존전략은 지난해 4월 가격 결정방식의 전환 발표로 구체화했다. 석유제품 가격의 국제가격 연동제다. 기존의 원유도입단가, 환율 등을 감안한 국내 방식에서 탈피, 세계시장 메이커의 제품가격에 연동하겠다는 것.

한마디로 수입업체 제품보다 결코 비싸지 않게 팔겠다는 의미로서 이를 통해 수입사도 견제하고 나머지 빅3 업체와 공격적인 가격차별화에 나서 고착화한 시장 점유율 구조도 무너뜨리겠다는 '방어와 공격'의 이중포석인 셈이다.

S-OiL측은 "1997년 석유제품 가격과 수출ㆍ입이 자유화한 만큼 우리 시장 역시 국제 시장과 아무런 울타리 없이 자유 경쟁체제에 놓이게 됐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가격과 무관하게 원료비와 정제비 적정이윤 등을 합산하는 가격 산정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공급자 우선의 횡포"라고 꼬집었다.

S-OiL의 이같은 선전포고는 지난 해 고유가가 지속되고 환율이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이면서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올 들어 환율이 폭등하면서 상황이 표변한 것.

실제로 S-OiL의 이번 달 가격동결은 후발업체로서 상대적으로 고급 설비를 갖춘 데 따른 원가절감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원유를 수입에 의존하는 입장에서 막대한 환차손을 감내하겠다는 것이어서 '출혈경쟁을 하자는 것이냐'는 정유업계의 비난을 받고 있다.


복수 폴, '태풍의 눈'

S-OiL이 사활을 건 작전에 나선 타이밍이 절묘하다. 공정위 조사로 정유업계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져 있는데다 지난해 고유가 파동으로 석유제품 가격인상에 대한 소비자의 반감이 극도로 치솟고 있는 시점.

가격차별화 작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호기(好機)인 셈이다. 게다가 정부는 최근 '폴 사인제 개선'이라는 함포지원 사격을 하고 나섰다.

공정위와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등이 최근 "주유소들이 정유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현행 폴 사인제를 개선, 정유업체간 가격 경쟁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폴 사인제 개선은 S-OiL이 수년 전부터 줄기차게 주장해 온 지상목표. 전국의 주유소망이 정유사별로 고착화해 있는 현행 단일 폴 사인제 하에서는 아무리 품질 좋은 제품을 값싸게 공급하더라도 시장점유율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복수 폴이 허용되면 목 좋은 타사의 주유소에 상대적으로 싼 자사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고, 이를 통해 시장판도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찮다. 나머지 정유사의 반발은 접어두더라도 복수 폴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주유소가 메이커별로 저장탱크를 따로 구분해 쓸 수 있는 시설을 갖춰야 하고, 이미 복수탱크를 보유한 일부 대형 주유소의 경우에도 정유사가 기존시설에 지원한 투자분 등을 정산해야 하는 등의 기술적인 문제도 수두룩하다.

이 때문에 복수 폴이 허용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게 정유업계의 대체적인 전망이지만 S-OiL은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는 반응이다.


'전투'아닌 '전쟁'을 보라

SK㈜와 S-OiL은 최근 민영화한 대한송유관공사의 경영권을 둘러싸고도 신경전을 벌였다. S- OiL측은 "송유관 분쟁과 가격 차별화를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즉, 가격 차별화는 이미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이번 달 가격 동결이 송유관 분쟁에 따른 감정적인 대응이 결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가격 싸움은 어떻게 전개될까. 결론적으로 '이번 싸움은 물론이고 향후에도 지속되기는 힘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유업계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캐스팅보트(LG와 현대)의 향배에 달려있다"고 단언했다.

이번 싸움의 경우 LG정유가 가격동결을 선언하면서 S-OiL의 편에 선데 이어 현대정유도 뒤따를 것으로 보여 SK도 가격환원(인상포기)이 불가피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중ㆍ장기 전망도 그렇다.

경영권을 위임받았다고는 하나 대주주사인 아람코(35%)의 눈총을 무시해가며 S-OiL이 무작정 가격 드라이브를 지속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고, 나머지 정유업계도 적자(혹은 이익감소)를 감내해가며 무한정 S-OiL의 뒤를 좇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양사의 마찰은 궁극적으로 복수 폴 등 최근 석유제품 시장의 환경변화에 따른 시장쟁탈 전쟁의 일부"라며 "중요한 것은 양사간 마찰이 그간의 지리한 탐색전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며, 이 전선(戰線)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 됐거나 소비자들로서는 잃을 것은 별로 없고 얻을 것은 많은 -적어도 당분간은 -싸움을 즐길 수 있게 됐다.

<표>정유사별 휘발유시장 점유율(2000년12월말 기준)

SK㈜ 37.9% LG정유 31.1% 현대(인천)정유 16% S-OiL 13.8% 수입(무폴)사 1.2%

최윤필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06 18:47


최윤필 경제부 walde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