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건물 안의 세 한국인

이른 아침의 사무실 빌딩은 어디서나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변호사 사무실이 많이 들어서 있는 우리 회사의 건물은 두툼한 서류가방을 옆에 낀 젊은 변호사들이 아침식사를 사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있다.

때로는 아침 운동을 마친 사람의 커다란 운동복 가방이 눈에 뜨일 때도 있다. 모두들 제 갈 길을 찾아가느라고 정신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보면 이 건물에 손님으로 온 사람은 금방 눈에 뜨인다. 지붕까지 훤하게 트인 홀에서 흘러나오는 인공폭포의 물줄기에 눈길을 주었다가 좌우로 갈라진 승강기 홀 입구에 걸린 안내판을 들여다보며 왼쪽으로 가야할지,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영락없는 손님이다. 재판준비를 주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하다보니 대형 변호사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우리 건물에는 늘 정장 차림의 신사들이 안내판을 보며 길을 찾곤 한다.

며칠전 아침에는 승강기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색다른 손님과 마주쳤다. 우리 건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동양인 세명이 안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연히 같은 승강기에 타게 되자 반가운 마음에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미스터 제임스 베이커를 만나러간다"고 하였다.

우리 회사 건물에 같이 입주해 있는 변호사 사무실 중에 'Baker & Botts'라는 사무실이 있다.

텍사스의 오래된 법률사무소로서 '텍사스 토박이나 기업에게는 Baker & Botts 외에는 법률사무소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무실이다.

이 사무실의 창립자 중의 하나인 제임스 베이커의 손자뻘되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고 이번에 아들 부시의 선거전에서 플로리다주의 법정공방을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제임스 베이커 3세다. 워낙 다른 일에 바쁘다 보니 짐 베이커는 변호사 사무실에는 자주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짧은 시간의 대화를 통해 알게된 것은, 한국에서 온 그 세 사람은 국내의 고위 정치인과 젊은 보좌관, 그리고 그 정치인을 따라 다니는 교수였다. 아마도 새로 들어서는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러 온 것 같다.

워싱턴에 온 김에 유력한 공화당 인사를 만나려고 짐 베이커의 사무실에 들른 것일 것이리라 생각하며 승강기를 내렸다. 특히 공화당과는 별로 긴밀한 유대관계가 없었던 한국의 여당에게는 새로 들어서는 공화당 정부와 공식적ㆍ비공식적 관계를 많이 설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을 위하여 한국에서 많은 정ㆍ재계 고위 인사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국회의원만 해도 30여명 가까이 왔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우리 집 아이들이 취임식 중계를 보면서 "한국에서 온 사람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카메라가 모든 참석자를 다 비출 수는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30명이나 되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취임식장에 들어설 자리는 없다. 대중정치로서의 민주정치를 실행하는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식 자리야 당연히 당선에 공헌을 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내어준다.

특히 이번처럼 치열한 선거전을 벌인 경우에 부시 후보의 당선을 위해 애쓴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들의 노력과 봉사에 보답하려면 아무리 취임식장이 넓더라도 모자랄 터인데 외교 의전상 필요한 것이 아닌 바에야 외국에서 온 정치인에게 내줄 자리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뻔한 이치를 알면서도 수많은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먼 발치에서나마 미국 새 행정부의 취임을 목격하였다는 이야기 거리나 만들려는 것인지 무작정 상경식으로 워싱턴으로 왔다. 설날 세밑 전인데도 지역구를 다니며 표밭을 가꾸기보다는 위싱턴행을 택한 것을 보면 의원들로써는 '살신성인의 의원외교'를 한 셈이다.

승강기에서 만났던 그 국회의원이 짐 베이커와 좋은 만남의 시간이나 가지고 조그마한 소득이나마 얻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1/02/0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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