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의 세계] 커피

맛과 향에 매료되는 個性의 음료

커피만큼 친근한 음료도 많지 않다. 그러면 당신의 기억 속에 가장 깊이 남아있는 커피 맛은?

13년째 커피를 즐기고 있는 정찬교(34)씨의 이야기. "올 1월 초 한 스키장 전망대에서 만들어 마신 커피가 가장 인상깊었다. 에티오피아산 이르가쉐프 원두커피였다. 드리퍼(커피 내리는 기계)로 프렌치프레스를 준비해갔지만 더운 물이 문제였다.

할 수 없이 전망대에 있는 정수기에서 더운 물을 빼내 커피를 내렸다. 비록 물이 적정 온도는 아니었지만 설경과 스키어들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맛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커피 맛은 환경과 분위기, 기분에 달렸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커피 동호회 '까페 노블리안'의 회장 김도윤(27)씨의 추억은 군복무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산 육군훈련소를 퇴소하기 직전이었다. 마지막 훈련으로 40km 행군을 남겨둔 그는 다리 인대가 늘어나 훈련참가가 어려웠다.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는 지휘관의 말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하며 행군에 나섰다.

35km 정도 지났을까.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지프를 타고 훈련을 지휘하던 부연대장(중령)이 갑자기 훈련병 김씨를 불렀다. 부연대장은 "다친 몸으로 훈련에 참가하는 열성이 장하다"며 지프에서 보온병과 종이컵을 꺼낸 뒤 직접 인스턴트 커피 한잔을 타주었다.

김씨가 감격해 눈물을 글썽이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부연대장이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 평생 이런 커피 마시기 힘들거다." 정말 김씨는 그때 마신 커피 맛을 가장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잔의 커피로 마음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커피는 개성(個性)의 음료다. 커피 마시기가 취미이고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사람들, 즉 커피 마니아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말이다.

그들은 어떤 커피를 어떻게 마시든 그것은 마시는 사람의 취향이지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자판기 커피든, 커피전문점에서 마시는 커피든, 아니면 집에서 손수 후라이팬에 생두를 볶고 갈아 마시는 커피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마니아들이 말하는 개성에는 마실 때의 분위기와 심리가 포함된다. 똑같이 만들어낸 커피라 하더라도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 커피를 마시는 것이 단순히 음료로서의 커피를 마시는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커피에 투영된 자신의 마음을 마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종류든 커피 한잔으로 마음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면 그만이다.

커피가 개성의 음료이긴 하지만 마니아들은 극성스럽다. 단순히 즐기는 게 아니라 열심히 즐긴다. 부부가 집에서 직접 생두를 볶아 커피를 만들어 마시면서 독특한 맛을 찾아나가는 경우도 있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통하는 5단계의 발전단계, 즉 마니아의 단계가 있다.

첫째가 맛있는 커피집을 찾아다니는 단계다. 인스턴트 커피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새로운 맛을 추구하는 단계다. 여기에는 대부분 어떤 계기가 있다. 정찬교씨는 "인스턴트 커피만 마시다 제대로 된 원두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 일종의 정서적 충격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단 커피의 특별한 풍미를 느끼게 되면 취미단계로 접어든다.

둘째는 볶은 상태의 원두를 사서 직접 갈아마시는 단계. 셋째는 커피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단계다. 관련 서적을 사서 읽고 이론적인 배경을 쌓으면서 커피 맛을 평가하려 드는 단계다. 다른 사람의 커피 취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평도 하고 간섭도 하게 된다.

마니아들은 이 단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내세우려든다는 의미에서 '선머슴 단계'라고 부른다.

넷째는 생두를 직접 볶아 원두로 만들고 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갈아서 마시는 단계다. 자기의 독특한 취향을 찾는 단계이자 시행착오 과정에서 특별한 재미를 느끼는 단계다.

4단계에 도달한 마니아는 국내에서 1,000명 이내로 추산되고 있다. 마지막 다섯째 단계는 아예 카페를 차려 직업으로 삼는 경우다.


볶고 가는 방법에 따라 맛 천차만별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은 흔히 "커피는 알코올이 없는 와인"이라는 말을 즐겨쓴다.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다 볶고 가는 방법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인이 일단 병입된 것을 마시는 반면 커피는 취향에 따라 손수 제조해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 개성이 더욱 강하다는 주장도 있다.

생두(와인으로 따지면 포도)를 사서 직접 볶아 커피액을 추출한 다음 취향에 맞춰 각종 첨가물도 넣을 수 있다는 것.

커피 마시는 데 특별한 에티켓은 필요없다. 이야기 꽃을 피우며 즐겁게 마시면 최고다. 다만 상대방에게 자기의 취향을 너무 내세우거나 맛을 본다며 스푼으로 훌쩍거리는 행위는 커피를 만든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 희석하지 않은 커피 원액을 그대로 마시는 에스프레소가 비록 '커피의 심장'으로 통하지만 에스프레소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커피를 오랫동안 마셔왔음에도 불구하고 참맛을 안지는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람이 많다.

20여년간 커피를 마셨다는 추연공(48)씨는 "제대로 맛을 이해한 건 2년이 채 안된다"고 말했다. 추씨는 4단계에 이른 마니아다. 그가 특히 즐기는 커피는 에스프레소. 평소 회사에서는 여전히 자판기 커피를 많이 마신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커피 한잔이 주는 즐거움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커피, 특히 카페 등에서 마시는 커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했다. 1970~1980년대에는 커피 하면 물장사와 다방을 떠올렸지만 이제는 풍미와 분위기를 추구하는 젊은이의 새로운 문화로 탈바꿈되고 있다.

현재 커피 동호회는 인터넷 통신회사와 카페를 중심으로 약 80개가 형성돼 있다. 회원은 300명을 넘는 곳도 있지만 모임을 위한 장소(커피집)의 한계로 50명 이내가 대부분이다.


80여개 동호회 모임, 회원들이 카페 평점도

호텔 신라가 운영하는 노블리안 닷컴(www.noblian.com)의 커피 동호회 '까페 노블리안'의 회원은 35명. 대학생에서 36세까지 다양한 직업의 남녀가 모였다. 매월 한차례 정기모임과 수시적인 번개모임을 갖는다.

회장 김도윤씨에 따르면 정기모임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커피전문점이나 맛이 논란을 빗고 있는 카페, 새로 생긴 카페 등에서 이뤄진다. 맛을 평가하고 새로운 맛을 즐기기 위해서다. 모임 후에는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각 카페에 대한 평점도 매긴다.

회원들의 취향도 가지각색. 아이스커피를 즐기는 김도윤씨는 하루에 1.8리터를 마신다.

식후에도 맹물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회원 박정현(29)씨는 카푸치노 초콜릿, 정지윤(27)씨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즐긴다. 3~4년 전부터 커피를 즐겨마셨다는 정지윤씨는 "커피 고유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며 에스프레소 예찬론을 펼쳤다.

그가 하루에 마시는 커피는 3~6잔. 이번 번개모임에 참석한 회원은 4명. 각자 주문한 커피와 여기에 곁들인 치즈케익을 놓고 그들은 커피 이야기에 파묻혔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06 20:08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