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스타열전(47)] 미디어링크 하정률 사장(下)

"신문에서는 'IMF 한파'라는 표현을 즐겨쓰는데, 막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에게 IMF는 한파가 아니라 태풍이었어요. 준비를 완벽하게 갖췄다고 자신만만했지만 막상 IMF가 터지니 도무지 대책이 없더라고요. 직원 월급도 못줬어요.

그나마 어렵다고 기술개발 속도를 늦추면 아무 것도 안되겠다 싶어 죽기살기로 밀어붙였는데, 직원들이 잘 견뎌주었습니다."

하정률 사장은 '준비된 벤처기업가'답게 미디어링크를 창업할 때만 해도 다른 사람보다 분명히 앞서 있었다.

자본금 10억원을 기준으로 자로 잰 듯이 사업기획안을 만들었고, KTB 근무경험에서 얻은 산 지식을 바탕으로 창업이후 직면할 여러 문제점을 예측하고 빈틈없이 대비책을 세웠다. 기술개발 및 상품화 일정도 촘촘하게 짰고, 그에 따른 자금확보 계획도 기막히게 세웠다.

그러나 IMF는 그의 머리를 비웃듯 모든 계획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버렸다.

하 사장은 "IMF가 그렇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습니다"라면서 "비즈니스 방향 정도가 겨우 맞아떨어졌습니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는 또 "벤처기업을 제대로 한번 해볼려고 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는 말로 초반의 실패를 인정했다.


KTB에서의 투자실패로 경영 마음가짐 바꿔

그가 비즈니스 분야로 선택한 네트워크 장비 분야는 인터넷 혁명의 최대 수혜자다. 인터넷 바람이 거세게 불면 순수 인터넷 기업보다는 오히려 장비업체나 소프트웨어 업체가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는 판단은 정확했다.

그런 흐름은 미국에서 이미 확인됐고, 닷컴(.com)기업의 몰락이라는 어이없는 시대조류에도, 장비업체는 여전히 매력적인 비즈니스로 남아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창업하기 전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는 회한이 하 사장의 머리를 때린다.

KTB에 들어갈 때 5년만 경험을 쌓고 직접 벤처기업을 경영하기로 다짐했으나 그 기간이 무려 9년으로 늘어났고, 책과 현실 사이에서도 고민 꽤나 했다. '돈장사'에 뛰어든 후회도 없지 않았다. KTB 근무 9년간 100억~200억을 허공에 날렸을 거라는 게 그의 추산.

1993년에는 그가 투자한 기업 중 두개 업체가 같은 날 부도가 나는 치욕도 맛봤다. 하루 2개 업체의 부도는 KTB 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그때 그는 경영의 마음가짐을 바꿨다고 했다.

"혹시 사업하다 망하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세요? 처참하죠. 주변사람이 모두 고생합니다. 그 허망함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어요. 일(사업)을 벌이면 들어먹지(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을 굳혔어요." 실패를 딛고 일어선 그의 투자는 1998~19999년의 벤처붐으로 KTB측에 몇천억원의 수익을 안겨주었다.


초고속 첨단장비 개발로 매출 늘어

하 사장이 창업한 뒤 개발 인력 구하랴, IMF 위기에 대처하랴, 허둥지둥하다 보니 1년이 금방 지나갔다. 돈줄은 계속 말라 정책금융으로 근근히 버텼다. 극한 상황에서 눈빛만 살아 있는 30명의 연구인력이 1998년 7월 첫 작품으로 LAN 스위칭 허브를 내놨다.

첫 작품으로 그 해 25억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하 사장은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경기가 살아나면서 개발 스피드를 올렸다. 직원도 대폭 늘어났다.

이듬해에는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그러나 자금은 여전히 달렸다. 매출이 늘어난 만큼 투자도 함께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디어링크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함께 '기가비트 이더넷 백본스위치 시스템'을 국내 처음으로 상용화한 것도 2년여간 70억원의 연구비를 쏟아부은 결과다.

물론 그 효과는 크다. 이것은 기업이나 대학, 관공서의 LAN에서 데이터를 1Gbps 전송속도(1초에 신문 600장을 송수신하는 속도)까지 낼 수 있는 초고속 첨단장비다.

그동안 연간 600억원 규모의 외국산 장비에 의존했던 분야다. 하 사장은 이 장비로 2003년까지 수출 1,000만 달러, 500억원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고 있다. 미디어링크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지난해 3/4분기부터 들어오는 돈(수입)과 나가는 돈(지출)이 같아지기 시작했어요. 올해 중반이면 자체적으로 굴러갈 것으로 봅니다. 그래도 주주들을 생각하면 실적을 더 내지 않으면 안되지요. 가급적 지난 4년간 직원에게 실적 스트레스 안 줄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그는 "직원들이 새해에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하겠다고 하니까 믿어봐야지요"라고 짐짓 여유를 부렸다.


벤치마킹할 기업이 없다는 어려움도

그는 올해야 말로 외국산 장비들과 한바탕 붙어볼 작정이다. ATM 스위치와 LAN 스위치의 시장 점유율을 크게 늘리고, IMT-2000용 이동통신 장비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시험중인 이동통신장비 IP시스템의 상용화에 주력할 계획이다.

해외진출의 꿈도 야무지다. 중국에는 1999년5월에 베이징 사무실을 열었다. 그때 주변에서 '하 사장이 미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다르다.

"중국사무소 개설도 창업기획안에 원래부터 들어있던 것입니다. 한국은 시장이 좁아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가깝고 시장이 큰 중국으로 가야 해요. 그런데 중국시장을 공략할 마케팅 전략과 전문가가 없어서 고민입니다. 속성으로 인재를 키우는데, 잘 될런지."

가장 힘든 것은 역시 벤치마킹할 기업이 없고 국내의 네트워크 기반기술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큰 프로젝트 하나를 추진하면서 소소한 것을 아웃소싱을 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기업을 찾을 수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볼트 너트 하나부터 모두 우리가 개발해야 하니 죽을 지경입니다. 사소한데 신경쓰다 보니 개발속도는 자꾸 더뎌지고, 급한 마음에 속만 탑니다"는 말에서 그의 답답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속을 끓이는 것은 또 있다. 코스닥 상장은 원래 2002년으로 잡았는데 1999~2000년 코스닥 열풍이 불면서 투자자들이 '왜 코스닥에 등록하지 않느냐'고 난리를 피웠다.

현재는 코스닥이 한풀 꺾이는 바람에 잠잠해졌지만. 준비된 벤처기업인에서 성공한 기업인으로 올라서고 있는 하 사장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은 뭘까.

"창업하기 전에 독창적인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수년간 실전감각을 익혀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사한 기술력을 가진 선발업체나 후발업체에 밀려 퇴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시 벤처로 성공하는 길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2/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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