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45)] 가나(假名)

일본 문자인 가나(假名)는 한자의 일부나 많이 갈겨 쓴 초서를 본딴 글자로서 음소를 표기하는 한글이나 알파벳과 달리 음절을 나타낸다.

원래 한자를 '진짜 글자'라는 뜻으로 '마나'(眞名)라고 하고 가나는 '빌린 글자'라는 뜻으로 '가리나'라고 했으나 발음하기 쉬운 '간나'로 바뀌었고 그것이 다시 줄어 현재의 이름이 됐다. 제 문자에 대해 별로 곱지 않은 이름을 붙인 것은 조선시대에 한자를 '진서'(眞書)라고 하면서 한글을 '언문'이라고 했던 일을 연상시킨다.

현재의 가나는 기본적으로 50음으로 이뤄져 있지만 표기할 수 있는 음절은 이보다는 훨씬 많다.

우선 글자 오른쪽 위에 따옴표 비슷한 두개의 점이나 작은 동그라미를 찍어 '하'로 '바ㆍ파'를 표기할 수 있다. 또 글자의 오른쪽 아래에 '야ㆍ유ㆍ요'를 작게 써서 '시'에서 '샤ㆍ슈ㆍ쇼'를 끌어내는 식의 확장법이 있고 'ん'(가타가나 ン)을 붙여 표기를 넓힌다.

그러나 표기가능한 모음이 단모음과 복모음을 합쳐도 '아ㆍ이ㆍ우ㆍ에ㆍ오ㆍ야ㆍ유ㆍ요' 등 8개뿐이듯 음절 단위의 문자 조합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자음과 모음의 무한한 조합이 가능한 한글이 디지털 방식이라면 가나는 아날로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이유로 가나를 뒤떨어진 문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일본인이 오랫동안 불편없이 써왔고 적어도 일본어 표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외국어 표기의 한계가 자주 거론되지만 모든 문자가 제나라 말을 표기하기 위한 것일 뿐 외국어 표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정도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영어의 알파벳으로 프랑스어나 독어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고 한글도 중국어를 다 표기할 수는 없다.

일본의 문자 생활은 한자의 전래로 시작됐다. 그러나 중국어 표기를 위한 한자로 일본어를 표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특히 지명이나 인명 표기는 어려움이 컸다.

이에 따라 음이 비슷한 한자로써 고유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고안돼 5~6세기 금석문에 이미 흔적을 남겼다.

이어 한자의 뜻을 빌려 표기하는 방식이 나타났고 오하리(尾治)ㆍ오하리다(尾治田)의 예에서 보듯 특정 발음에 특정 한자를 고정시키는 '지쿤가나'(字訓假名)도 나타났다. 또 '도코'(德)의 예에서 보듯 한자 하나로 2개의 음절을 나타내는 방법도 쓰였다.

이런 초기 형태의 가나는 7세기 들어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쓰였으며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요슈(萬葉集)에 널리 이용됐다는 점에서 흔히 '만요가나'라고 불린다.

초기의 만요가나는 거의 한자를 그대로 썼으나 나중에는 '마'(マㆍ部), '무'(ムㆍ牟)처럼 약자를 쓰는 예도 늘어났다. 만요가나의 한자음은 한(漢)ㆍ위(魏) 등의 고음을 기초로 한 것이 많아 후세의 한자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게'(居), '가'(奇), '로'(里) 등이 그런 예다.

또한 사람과 지역마다 같은 발음이나 뜻을 표기하는 데 전혀 다른 한자를 빌려쓴 예가 많아 해독에 어려움이 많다. 비슷한 표기 방법인 향찰이 의미소는 한자의 뜻, 형태소는 한자의 음을 빌리는 식의 구분을 두었는데도 향가 해석이 지금도 분분한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9세기 들어 만요가나의 일부분을 딴 '가타가나'(片假名)가 등장했다. 이 또한 수많은 이ㆍ변체자가 있었다. 가타가나는 본격적으로 일본어 문장을 표기하는 대신 불경에 토를 다는 등 한자의 보조적 기능에 머물렀다.

우리의 구결이 이두ㆍ향찰과 달리 한문 문장의 토를 다는데 주로 쓰였던 것과 비슷하다. 가타가나는 15세기 들어 거의 현재와 비슷한 모습으로 정착됐고 1900년 정부령으로 형태가 고정됐다.

최근 14세기의 고려 문헌에서 가타가나와 아주 비슷한 구결 표기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한자로 제나라 말을 표기하려는 노력이 비슷한 경과를 거쳤음을 확인하면서 한글 창제의 고마움이 새삼스럽다.

한편 만요가나 시대부터 한자 초서체를 더욱 간소화, 한자의 구속에서 벗어난 문자가 한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여성층의 일기나 편지에 쓰이기 시작했다.

여성용 문자라는 뜻에서 '온나데'(女手)로 불린 이 글자가 바로 '히라가나'(平假名)로 한글 궁체처럼 자형이 부드럽고 붓으로 쓰기에 알맞다. 히라가나는 에도(江戶)시대 들어 남성사회에서도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1900년에 가타가나와 함께 자형이 고정됐다.

오늘날 히라가나는 일본의 기본 문자로 쓰이며 가타가나는 외래어나 동식물명 등의 표기에 제한적으로 쓰인다. 1945년 패전과 함께 초등학교에서 히라가나를 먼저 가르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이전에는 가타가나를 우선 가르쳤고 공식문서는 한자와 가타가나로 쓰였다. 그것도 가타가나는 형태소에만 쓰였다는 점에서 가나가 공식적으로 일본의 문자로 채용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2/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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