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 밀어?… 한화갑의 선택은?

"대권주자냐 킹메이커냐" 가능성·한계 혼재된 입지

민주당의 한화갑 최고위원은 2월7일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는" 원내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했다.

다소 흥분했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았다는 평도 있다. '리틀 DJ'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최고위원의 진수는 대표연설의 경우와 같은 원고 연설보다는 역시 즉흥 연설에 있다는 얘기도 곁들여졌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조리가 있고 힘이 실린 연설이었다는 것이 당내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여권내 차기 대권주자의 한사람으로 거론되고 있는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은 이날 한 최고위원의 대표연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노 장관은 국무위원석에서 연설을 듣고 나서 민주당 원내총무실에서 한 최고위원을 만나 "내가 들은 국회 연설중 최고였다"고 극찬을 했다.

노 장관은 내친 김에 "김대중 대통령을 연상케 했다", "정말 김 대통령과 똑같았다"며 한참 열을 올렸다. 노 장관은 "누가 썼는지 정말 훌륭했다"며 연설내용에 대해서도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같은 상찬에 겸연쩍어진 한 최고위원은 "내가 노 장관에게 갖고 있는 호감을 노 장관도 내게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정도로 받아넘겼다.


당내 막강 영향력 소유

노 장관의 한 최고위원에 대한 호감 표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노 장관은 7일 국회에서 해양수산부로 돌아온 뒤 출입기자들과 만나 한 최고위원에 대해 "연설만큼 안목이나 자질면에서 정치인으로 뛰어난 분"이라고 다시 칭찬을 이어갔다.

민주당 실세인 동교동계 내에서 한 최고위원을 견제하고 있는 권노갑 전 최고위원에 대해서도 노 장관은 직설적인 평가를 내렸다.

노 장관은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나 과거에 시대적 역할에 충실했다고 본다"면서 "그렇다고 지도자감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말인즉 한 최고위원을 지도자 반열에 올린 반면 권 전 최고위원의 지도자 자격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노 장관의 개인적 발언과 평가를 다소 장황하게 소개한 것은 그것이 한 최고위원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한 최고위원의 현재와 미래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최고위원은 대권후보가 되겠다고 부심하고 있는 노 장관이 다소 과장된 어법의 칭찬으로 연대의 줄을 대고 싶어하는, 막강한 당내 영향력의 소유자가 됐다.

2002년 초 여당 대권후보를 결정지을 전당대회를 겨냥하고 있는 당내 차기주자들 중 한 최고위원과 연대하고 싶어하지 않는 인사는 한사람도 없다. 이인제 최고위원, 김근태 최고위원은 물론 구여권 출신인 김중권 대표조차도 한 최고위원과의 연대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

한 최고위원은 사실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에서 1등을 함으로써 김 대통령의 비서 출신 정치인에서 대중적 정치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경선 1등은 곧 당내 지지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2002년 대선후보를 결정할 당내 경선에서도 한 최고위원의 실질적 영향력은 결정적일 수 있다.

한 최고위원 본인은 이같은 자신의 입지에 대해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한화갑- 권노갑, 즉 양갑 갈등으로 표현되는 동교동계 내부의 문제는 내가 경선에서 1등을 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데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 발언의 요지다.

한 최고위원의 말을 뒤집어서 해석하면 '이제는 (권 전 최고위원의 2선 퇴진으로) 갈등의 요소는 어느 정도 정리됐고 동교동계 내부의 현실과의 괴리 문제도 해결의 가닥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현안에 대해 자기목소리 높여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한 최고위원이 올해 들어 상당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는 크고 작은 정치적 현안에 대해 보다 많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당내 대권경쟁을 의식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지난해 말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사가 대선후보가 되지 못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는 당시에 당내 기반보다는 대중적 지명도와 인기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자신의 위상을 극적인 표현으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해석을 낳았다.

이를 좀더 적나라한 말로 바꾸면 '당내 기반은 부차적인 것이며 대중적 지지도가 가장 높은 내가 대선후보가 돼야 한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은 물론 아니었지만 한 최고위원이 최근 "민주당의 대선후보는 결국 당원이 최종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당내 지지를 오히려 결정적 변수로 상정한 것으로 듣기에 따라서는 이 최고위원의 '국민의 지지' 발언에 쐐기를 박고 균형을 잡은 것이다.

한 최고위원은 또 김중권 대표에 대해서도 "최고위원 경선 때 김 대표를 도운 것은 영남에서도 최고위원이 나오는 것이 당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지 개인적인 발로에서 지지를 하거나 도와준 것은 아니다"며 확실한 선을 그었다.

한 최고위원이 때로 다른 대권주자와의 사이에 뚜렷한 각을 세우고 때로는 선명한 경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대중적 정치인으로서 종속변수가 아닌 주도적 변수가 되기 위한 두번째 관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해나가면서 대중적 지지도를 넓혀나가려는 시도는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1997년 대선에 출마했던 지명도를 바탕으로 현장정치에 나서고 있는 이인제 최고위원이나 집권당 대표의 프리미엄을 갖고 본격적 대선 행보를 벌이고 있는 김중권 대표에 비하면 한 최고위원의 활동 공간은 상대적으로 좁다.

그렇다고 '튀는 발언'으로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식을 쓰고 있는 노무현 장관의 경우를 한 최고위원이 원용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자신에 대한 노 장관의 칭찬이 결국 '대선 후보는 내가 할테니 뒤에서 밀어달라'는 즉, 킹 메이커의 역할에 만족하라는 얘기라는 것을 한 최고위원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역시 한 최고위원의 가능성이자 한계일 수 밖에 없는 정곡을 찌른 측면이 있다.


'정치적 그릇' 검증받는 위치로

한 최고위원은 여전히 의미 있는 정치적 행위를 쉽게 하지 않는다. 부시 미 대통령 취임식 때 미국을 방문, 이인제 최고위원을 만나자고 한 것은 그나마 작심하고 한 행동이다.

한 최고위원은 워싱턴에서 중간에 사람을 보내 이 최고위원을 만나자고 청했고 식사를 겸한 1시간30분 동안의 대화중 상당부분은 단둘이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지난 최고위원 경선 때 다소 껄끄러웠던 관계를 회복하고 두 사람이 장ㆍ단기적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정치적 공통분모를 탐색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한 최고위원은 아직 다른 대권주자에 비해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한 최고위원도 자신을 드러내놓고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 평가를 기다려야 하는 위치에 있다.

권 전 최고위원이 내외문제연구소 재건을 추진하는 등 정치적 역할 재개에 나서려는 상황도 한 최고위원에게는 예사롭지 않다. 한 최고위원이 킹 메이커에 그치느냐, 아니면 자생적 후보로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느냐의 여부는 앞으로 그가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다.

고태성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13 18:30


고태성 정치부 tsg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