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 남북관계, 後 북미관계 개선"

지난 2월7일 오전 10시(한국시간 8일 0시) 미국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 내의 장관전용식당(Secretary's Dining Room).

"앞으로 북ㆍ미 관계가 남북 관계를 앞서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늦은 아침식사'(late breakfast)를 겸해 1시간 전에 시작된 한ㆍ미 외무장관 회담의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마주앉은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향후 한반도 정책의 골간에 대해 이렇게 운을 뗐다.

파월 장관은 이어 "미국은 한국이 대북정책을 추진해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북한에 대한 정책을 추진하겠다"며 "남북 관계의 진전 상황에 따라 대북 관계를 설정하겠다는 게 미국의 기본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한반도정책 새 가이드라인 확인

'선(先) 남북관계 진전, 후(後) 북미관계 개선.' 미 외교사령탑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새 가이드라인이다. 새 가이드라인의 함의는 무엇일까. 향후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에는 어떤 변수로 작용할까.

'파월 선언'을 읽는 국내 시각의 스텍트럼은 다양하다.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는 정부의 시각이 있는가 하면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남북관계 진전에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는 견해도 나온다.

한ㆍ미 외무장관 회담을 수행했던 정부의 한 당국자는 "파월 장관의 발언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우리와 먼저 협의를 거쳐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로써 남북대화에 부담없이 매진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반면 한 외교전문가는 "북미 관계의 진전없이 남북관계가 진전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며 "향후 우리 정부가 북한을 설득해 미사일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날의 한ㆍ미 외무장관 회담 결과는 일단 미국의 새 정부가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지를 불안한 눈길로 주시해왔던 정부 당국자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 책임자들은 정부 출범 18일만에 워싱턴을 찾은 한국의 외교팀에게 미국은 여전히 한국의 굳건한 동맹국이라는 점을 심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파월 장관은 회담 후 오찬을 갖자는 우리측 요청을 사전일정 때문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당초 45분으로 예정됐던 회담 시간을 1시간15분으로 늘리고 형식도 '늦은 조찬을 겸한 회담'으로 바꾸는 등 이 장관 일행을 최대한 예우했다.

회담 후 공동언론발표문을 낸 것도 다른 나라와의 회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한국을 위한 배려였다. 정부 당국자는 "파월 장관이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고 실무진이 짜이기도 전에 회담을 열고, 공동언론발표문을 낸 것은 한반도 문제에 미국이 부여하는 중요성을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한국 대북정책에 확고한 지지 표명

형식만이 아니었다. 파월 장관은 한국 정부가 이번 회담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부시 정부 출범 후 한국 내부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한ㆍ미간 이견설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의 확실한 보증을 얻고자 했던 한국 정부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한 배석자는 "이 장관의 말을 조용히 메모하던 파월 장관이 '이 장관이 한ㆍ미 공조의 중요성에 대해 10번이나 거론했는데 나는 20번이라도 강조하고 싶다'고 화답했을 때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파월 장관은 특히 1970년대 동두천에서 보병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한 경험을 언급한 후 "한국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을 위해 공사(公私)간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고 말해 참석자들을 뭉클하게 했다.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도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을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외무장관 회담후 별도로 진행된 이 장관과의 면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한반도에서 이룩한 진전을 높이 평가한다"며 "특히 김 대통령이 통일후에도 동북아의 세력균형자로서 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인정한데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 내에서 논란이 됐던 '햇볕정책'이란 단어를 일부러 거론하며 한국 정부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려는 인상이 역력했다.

양국이 대북정책 조율을 위해 차관보급 상시협의체를 가동하는 등 협력체제를 강화하기로 한 것도 향후 대북정책이 양국간 튼튼한 정책공조 속에서 추진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었다. 미측이 차관보급 협의체 가동에 대한 우리측 요청을 수용한 것은 향후 미국의 대북 정책 설정 및 추진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미국의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과의 관계설정에는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파월 장관은 회담에서 "북한의 변화 자체는 긍정적"이라며 밝혀 북한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파월 장관의 주안점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직도 지켜볼 부분이 많다"고 말함으로써 북한의 본질적인 태도 변화에 부정적인 시각의 일단을 내비쳤다.

특히 그는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북한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북ㆍ미 관계의 진전을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등 대북 접근에 일정한 선을 그었다.


북한에 엄격한 상호주의 적용

이 점에서 "북미 관계가 남북 관계보다 앞서가지 않겠다"는 파월 선언은 북한에 대한 엄격한 상호주의를 요구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내의 시각을 반영하는 또다른 표현인 셈이다.

대(對)북한 경제제재 해제를 보상으로 북한 미사일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했던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북한의 미사일 개발계획 포기에 대한 확실한 검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경제적 보상은 없다는 부시 행정부의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것이다.

주로 한국측의 설명을 듣는 쪽에 있었던 미측 인사들이 북한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종국적인 구상과 북한이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내용을 궁금해했던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이런 질문 속에는 남북한 정부간 비밀합의 가능성에 대한 미측의 의구심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 인내할 수 있는 남북관계 진전의 한계선이 어디까지냐는 것이다. 미 외교사령탑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이 한국에 있다고 선언한 이상 미국은 당분간 남북한간 화해ㆍ협력의 구체적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미국의 관심사인 미사일 문제에서 가시적 조치를 보이는데 인색할 경우 미국이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을 일방적으로 후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불 보듯 뻔하다.

한 외교 전문가는 "미국이 북한의 태도를 지켜보겠다고 한 것은 북한이 미사일 발사유예를 연장하는 선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상황을 인정하겠다는 뜻이 아니다"며 "북한이 구체적인 조치들을 내놓지 않을 경우 미국이 인내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상황은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보폭을 맞추면서 북한과의 관계개선의 속도차를 조절해야 할 필요성을 높여주고 있다. 3월 중순께로 예정된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간 정상회담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승일 정치부 차장

입력시간 2001/02/1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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