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族] "자기 테스트도 하고 돈도 벌고"

2월10일 토요일 오후 3시 여의도 MBC. 200여명이 모인 지하 1층 식당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모인 사람들의 구성은 가지각색이다. 20대와 30대 남자가 가장 많아 보이긴 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남자도 있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10대 후반의 여성도 있다. 제법 모양을 낸 중년 여성도 눈에 띈다.

이들이 여기에 모인 이유는 하나. '생방송 퀴즈가 좋다'(일요일 오후 5시10분) 출연을 위한 예심을 치르기 위해서다. 작가 중 한명이 나와 문제지를 나누어주자 한 문제라도 빨리 풀려는 듯 손놀림이 바빠진다.

예심 문제는 모두 30개. 15분 안에 풀어야 한다. 매번 상대평가로 채점되기 때문에 커트라인은 없지만 대개 23개 전후를 맞혀야 통과할 수 있다. 한번에 12~14명 정도 뽑으니 약 14:1의 만만치 않은 경쟁이다. 예심에 붙어도 제작진과의 면접을 통과해야 7명의 출연진에 들 수 있다.

하지만 예심을 보게 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예심 신청은 인터넷으로 받는데 매주 8,000명 가까운 사람이 접수한다. 이들 중에서 제작진이 나이, 성별, 직업, 학력 등에 따라 약간의 안배를 해 무작위로 200명을 뽑는다. 무려 40:1의 엄청난 경쟁률이다.

식당 앞에서 만난 설모(43ㆍ공무원)씨는 지난해 3월부터 50번 넘게 신청을 한 끝에 겨우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도 안되길래 신청서를 들고 방송국으로 직접 찾아갔죠. 작가에게 항의반 사정반까지 해서 겨우 오늘 오게 된 겁니다."


예심만 통과해도 '대단한 일'

매주 8,000명이라면 중복되는 사람을 제해도 결코 적지 않은 수다. 여기에 또다른 주부대상 퀴즈 프로그램인 SBS '도전! 퀴즈퀸'(월~금 오전 9시)도 인터넷으로 1심을 보고 다시 30문제를 푸는 2심을 거쳐야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는데 1심 신청에 매주 1,000~2,000명 정도가 몰린다.

'퀴즈가 좋다'와 마찬가지로 1심 시험에서 150~200명 정도를 거른다. 2심에서는 보통 50점을 넘어야 통과할 수 있다. 두 프로그램을 합하면 매주 1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퀴즈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면 집단적 의미를 갖는 '퀴즈족'이라 부를만 하다.


긴장으로 오답 "창피해서 밥도 못먹었어요"

이윽고 시험이 끝났다. 시험장을 나서는 사람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워보였다. 문제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분명히 떨어졌을 것"이라며 끝내 익명을 요구한 설씨는 "문제가 너무 고난도"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그는 장학퀴즈 월장원 출신에 1991년 KBS의 '퀴즈박사'라는 프로그램에 190:1의 경쟁률을 뚫고 출연한 경력이 있는 골수 퀴즈족.

"예심에 대비해서 상식책은 물론이고 웬만한 관련 서적은 줄줄이 독파했죠. 다른 프로그램의 기출문제집까지 구해서 풀었습니다. TV로 볼 때는 한두개 빼고 다 맞춰서 내심 자신이 있었는데 문제가 너무 어려운 거 아닙니까?" 운동하는 거 말고는 퀴즈 푸는 게 유일한 낙이라는 그는 적잖이 실망한 나머지 다소 화까지 난 듯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55세의 공인회계사라는 여성 응시자가 다른 사람을 붙들고 30문제의 정답을 일일이 맞춰 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시험장에서의 긴장된 분위기는 어느새 초초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2월6일 불광동 여성개발원에서 있었던 퀴즈퀸 2심 때와 똑같은 현상이었다.

퀴즈 프로그램은 출연 희망자들만 긴장과 초초함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실제 방송에 출연하면 긴장과 초조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안병애씨는 퀴즈퀸에 유일하게 두번 출연한 사람이다.

"처음 나갔을 때 다 아는 문제인데도 너무 떨어서 떨어진 게 두고두고 아깝더라구요. 그래서 제한기간인 6개월을 지나 다시 나갔죠." 10여년전 SBS '알뜰살림 장만퀴즈'에서 경주여행권, 전기장판, 숙녀복 등의 상품을 탄 경험이 있어 더 그랬다.

그러나 안씨는 두번째도 다잡은 1승을 놓쳤다. 당황한 나머지 정답인 '콜린 파월'을 '폴린 코월'로 잘못 대답한 것. "너무 아깝고 창피해서 한동안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잤어요"라고 말하는 그는 세번째 도전을 망설이는 중이다.

그만큼 출연해서 정상에 오르기란 예심보다 더 어렵다. 퀴즈퀸의 경우 최종단계인 5승에 성공한 사람은 이제까지 8개월여 동안 1명뿐이고 '퀴즈가 좋다'도 9단계까지 정답을 맞춘 '달인'은 1999년 10월 첫방송 이래 경우 10명뿐이다. 제작진의 말에 의하면 출연자의 평균 성적은 5.5단계다. 객관식에서 주관식으로 넘어가는 중간쯤이다.

실제 퀴즈 프로그램에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많이 작용한다. KAIST 재학 중 친구와 함께 MBC 퀴즈 아카데미에서 최고인 7연승을 거두었던 박영권(31ㆍ현대중공업 산업기술연구소 선임연구원)씨는 비교적 쉬운 4단계에서 고배를 마셨다.

아는 문제라고 너무 확신한 것이 화근이었다. 10번 신청만에 예심을 보게 된 날 하필 포항에서 학회가 있어 비행기까지 타고 상경, 겨우 출연한 것이라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말도 안하고 나갔는데 본 사람이 많더라구요. 박사가 그것도 모르냐고 놀림도 좀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혼하면 부인에게 노하우를 전수, 주부대상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시킬까 생각 중"이라고 말한다. 역시 퀴즈족답다.

많은 사람이 퀴즈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도대체 왜 그럴까. 두 예심 시험장에서 만난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돈도 벌 수 있고 방송출연이라는 게 삶의 작은 이벤트가 되잖아요. 주변 사람에게 화제거리도 되구요."(박형준ㆍ32ㆍ회사원)

"TV 출연도 해보고 싶었고 상금 타면 좋잖아요."(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대학생) "퀴즈의 매력은 자기를 테스트할 수 있다는 거죠. 자기가 얼마나 많은 상식을 가졌나 하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신용수ㆍ39) "도전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아이들에게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 좋구요."(최옥순ㆍ가명ㆍ42) 공통된 대답은 지적 유희를 통한 자기 테스트와 돈이었다.


"겨루기는 긴장되면서 즐거운 일"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경험자들의 대답도 다르지 않았다.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못간 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는 안병애씨는 어려서부터 퀴즈를 좋아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뭔가 겨뤄볼 수 있다는 대상, 나 자신을 도태되지 않게 하는 목표가 있다는 게 긴장되면서도 즐거워요. 퀴즈는 대입시험과는 달리 학벌만 좋다고 꼭 잘하는 건 아니니까요." 퀴즈가 좋은 만큼 열심히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사무실에서 보고난 각종 신문을 가져다달라고 해 날마다 읽고 출연이 임박해서는 살림을 소홀히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중1, 초2인 아이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교육적 효과도 있었다. "엄마가 신문 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공부하라는 말 여러번보다 훨씬 낫더라"고 했다.

'퀴즈가 좋다'의 두번째 달인인 지일환(34ㆍ여행작가)씨는 마지막 문제를 맞추었던 순간의 느낌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말로 설명한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실력을 확인했다는 카타르시스가 컸다.

따로 공부는 하지 않았다는 그는 "평소에 세상일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면 누구나 퀴즈를 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86년 퀴즈 아카데미 예선 탈락 이래 퀴즈에 빠져 산 그는 이제는 문제를 듣는 순간 답이 떠오르고 설명까지 곁들일 정도가 되었다. 답을 본 다음 "저거 아는 문제다"라고 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경지다.

하지만 '퀴즈족'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만한 최근의 퀴즈 열풍은 자기 테스트라는 퀴즈 본래의 매력 보다는 현금지급이라는 새로운 보상제도가 결정적 요인이다. 상품이나 상품권대신 현금을 상금으로 내걸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신용수씨는 "아무래도 상품보다는 현금을 선호합니다. 상품은 겹치는 게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령시 공과금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니까요"라고 말한다.


현금지급이 가장 큰 매력

본격적인 현금지급은 '퀴즈가 좋다'에서 처음 선보이기 시작했다.

MBC 최영근 PD는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습니다. 방송관계법을 검토하고 관련기관에 문의해보니 문제는 없다고 했지만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상금의 공공성금화. 총상금의 50%를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기부하기로 했다. 상금의 세금이 22%이므로 2,000만원을 타더라도 성금 1,000만원을 제하고 다시 세금을 내면 실제 손에 쥐는 것은 780만원 뿐이다.

달인끼리 겨루는 왕중왕전에서 우승해도 4,000만원 중 1,560만원을 가지게 된다. 문제별로 액수가 정해져 있는 퀴즈퀸의 경우도 우승자가 가족 중 한명과 일대일 문답퀴즈를 풀어 60초안에 7개 이상을 맞추지 못하면 상금의 50%를 성금으로 기부하는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역대 최고 상금수령액은 유일한 5승자인 김문주씨의 1,116만원과 부상인 아반테 XD 승용차였다.

방송의 퀴즈 프로그램이 현금을 지급한다는데 대해 일부에서는 문제 몇개 풀고 수십~수백만원을 벌게 한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사행심과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반면 공인된 도박장인 카지노가 문을 열고 국가에서 복권을 발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방송 퀴즈 프로그램만을 문제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에 대해 최PD는 "퀴즈 프로그램인 만큼 교육적 측면보다는 오락적 측면에서 봐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한다.

방송국에서는 내심 상금액을 올리고 싶어하는 눈치다. 상금이 높을수록 시청률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퀴즈가 좋다'가 아이디어를 얻은 미국 ABC-TV의 '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는 100만 달러(약 12억원)를 내걸어 저녁 황금시간대에 드라마를 제치고 시청률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현재도 두 퀴즈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좋다. '퀴즈가 좋다'는 20%로 대단히 높은 편이고 퀴즈퀸도 7~8%의 시청률로 같은 시간대 아침 드라마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프로그램 도중 실시하는 ARS 퀴즈에는 매일 1,000~2,000여통의 전화가 걸려올 정도다. 맞냐, 틀리냐라는 단순명쾌한 포맷, 보면서 문제를 풀 수 있는 간접참여의 기회, 그리고 출연자가 과연 정답을 맞힐 것이냐는 적당한 긴장과 기대가 시청자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하는 탓이다.


시청자들에게 재미와 정보 동시에

퀴즈퀸의 김상범 PD는 "퀴즈 프로그램의 생명은 정보와 오락이다. 시사 위주의 정통 퀴즈라 하더라도 시청자들이 정보 외에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문제를 출제한다"고 말한다.

퀴즈퀸은 5명의 작가가, '퀴즈가 좋다'는 4명의 작가와 6명의 외부 출제자가 문제를 낸다. 출제자들은 신문, 잡지에서 백과사전, 상식책, 중ㆍ고등학교 교과서, 초등학생용 전과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한다.

김PD는 "이제 제작진은 무얼 봐도 문제로 만들게 될 지경"이라며 웃는다.

문제 푸는 것도 그렇지만 문제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시청률 외에도 퀴즈 프로그램은 제작비가 드라마 대비 3분의1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방송국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기쁨과 허탈이 교차하는 순간

시험 후 40여분이 지나자 작가 한명이 합격자를 발표하러 나타났다. 순식간에 그 주위로 우르르 몰려든 사람. 긴장의 파고는 극에 달했다. 마치 최종선고를 기다리듯 긴장된 표정들이었다.

한명한명 호명을 할 때마다 대입 합격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 가득 기쁨이 묻어난다. 이번 시험의 커트라인은 24점.

겨우 12명만이 예심 관문을 통과했다. 마지막 사람을 부르고 나자 허탈한 한숨소리와 함께 썰물 빠지듯 사람들은 흩어졌다.

취재를 마쳤다는 생각에 자리를 뜨려는데 십여명이 작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다.

"저., 다음에 또 예심을 볼 수 있나요?" 너무나 진지한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과연 퀴즈가 좋긴 좋은가 보다. 물론 예심에서 떨어진 사람은 언제든 다시 응시할 수 있다. 또다시 그 치열한 경쟁을 뚫기만 한다면.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13 20:12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