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화엄경 '금니사경' 완성한 원응스님

육필로 써내려간 불경의 완결판

스님이 산을 내려왔다. 목간 때가 아니면 좀처럼 지리산 자락을 떠나기 싫어하는, 깊은 산의 노스님. 절에서 아랫마을 인가까지 내려가는데만 1시간반 거리.

다시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야하는 서울행 나들이다. 장장 7시간이나 걸리는, 스님으로선 대장정. 그만큼 수고를 했으면 더 마음에 들어야 마땅하련만 팍팍한 서울구석은 지리산 생각만 더 간절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눈이 녹아서 질퍽거리긴 산속이나 서울이나 똑같네요. 네? 맞아요. 이번 폭설도 그렇고, 천재지변엔 서울도 꼼짝못하던 걸 뭐. 아니 더 난리던데요.

우리는 전기가 없어도 촛불 하나로 살 수 있는데 서울사람은 잠시만 정전이 돼도 온통 마비가 되잖아요. 어떻게 보면 서울이 시골보다 더 살기 불편한 동네예요."

법복에 흰 고무신을 끌고 서울을 찾은 원응스님(66. 대한불교조계종 벽송사 조실). 이 특별한 나들이엔 이유가 있다. 15년동안 원력을 바쳐 만든 대작, 화엄경 금니사경을 선보이기 위해서다.

그것도 스스로 나선 길이 아니다. 그 멋진 작품을 왜 혼자만 품고 있냐고 옆사람들이 하도 채근해 떠밀려나왔다. 사실 불자가 아니라도 그의 금니 사경은 눈여겨볼만한 예술작품이다. 쓴 사람의 마음까지 알고나면 더더욱 뭉클해지는, 한 노승의 육필 연서(戀書)아닌 연서다.


총글자수 120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양

총 글자수 60만자. 묵서사경까지 합치면 약 120만자를 혼자 썼다. 병풍처럼 접책한 사경 80권을 일렬로 편다면 총 1.3km에 이를만큼 방대한 양이다.

국가적 사업으로도 지원됐던 고려시대의 금사경 이후 처음 만들어진 것이라 불교계에선 특히 역사적인 대업이라며 감탄사가 연발이다.

화엄경은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도 도를 깨달은 후 말씀을 남겼다는, 이를테면 불경의 완결편 같은 것. 금니사경은 금을 진흙처럼 이겨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불경을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보기엔 간단하지만 원응스님이 얼마나 어렵게 이 일을 마쳤는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처음엔 봉은사판과 직지사판 화엄경을 일본의 신수장경, 대만의 중국장경 등을 낱낱이 대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단 하나의 오ㆍ탈자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침침한 눈으로 수십번 확인하고 확인한 끝에 표본을 마련, 먼저 먹으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 묵서사경을 기초로 삼아 금분으로 다시금 옮겨쓰면서 금니사경을 완성했다.

매일 서너시간은 꼭 이 일에 매달렸다. 원래 참선에 정진하는 선승이라 일과중 참선수행하랴, 일상을 보랴, 어렵게 만든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글자 하나 마칠 때마다 절 한번, 기도 한번. 십여년이나 걸린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일거수 일투족도 더 조심스러웠다. 옛 선인은 사경 작업중엔 화장실에 갈 때도 일부러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할 만큼 사뭇 외경스러운 대사였다.

몸 곳곳에서 탈이 났다. 그렇지않아도 속가의 나이론 칠순이 머잖은 노구. 뭣보다 오른쪽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한번 쓰면 이틀을 드러눕고 주사와 찜질로 버티다가 또 쓰러지면 며칠씩 굶으며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붓을 잡았다. 시력이 악화돼 실명 위기까지 간 적도 있다. 젊어서부터 앓아온 늑막염, 천식증세까지 괴롭혔다.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수도 없이 되삼켰다.

갈아치운 붓만 60여 자루, 종이는 수천장이 들었고 조계사 앞에서만 구할 수 있는 서예용 금가루도 약 4kg이나 썼다. 이를 위해 작업전 5년동안 시주받은 돈을 모으고 모아 아낌없이 털어넣었다. 자신의 몸이라면 차비도 아까운 스님. 젊은 사람도 고단해 할 장거리 여행에도 승용차를 마다한 채 버스, 열차를 고집하는 그다.

"몸이 너무 힘들어 이걸 어떻게 마쳤나, 지금 생각해도 아득할 때가 있습니다. 또 건강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반듯하게 안정되지 않으면 뜻대로 안되는 게 서예거든요.

기분이 좋을 땐 아주 잘 써지다가도 조금만 우울하거나 쓸쓸해도 글씨가 자꾸 빗나가요. 그럴 땐 차라리 일을 접고 참선을 한 뒤 다시 쓰곤 했습니다. 불교에서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사경을 권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마음공부때문이지요."


열아홉살에 출가, 어릴 때부터 '중이 된 팔자'

출가한 지 40여년. 열아홉살에 머리를 깎았다. 출가를 결심한 건 불교에 심취해있던 부친의 권유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기회를 주었고 스스로 기꺼이 승려의 길을 택했다.

그의 부친은 일제시대 중앙고보를 나왔다. 친일 교장에 대한 동맹파업 학생시위에 앞장 섰다는 이유로 더이상의 진학이 좌절됐다.

차라리 한의학을 공부하겠다며 산사를 찾아다니다가 불교에 매료됐다. 나중엔 수덕사 만공스님으로부터 계문을 받을 만큼 고승들로부터도 남다른 신뢰를 받던 독실한 불자였다.

그의 소원 한 가지도 이미 자신은 처자를 거느린 상태라 속세를 떠나지 못할 몸, 자녀 중 하나는 불문에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선택받은 아들이 5형제중 둘째였던 원응스님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심한 늑막염으로 휴학해 집에서 쉬던 중 부친이 넌즈시 "절에 가서 지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출가를 염두에 둔 권유였다. "싫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고 했다. 며칠이든, 몇달이든 내키는 만큼만 있어보라는 것이었다.

진즉부터 그는 '중이 될 팔자'였는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고기며 비린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된장국에 멸치만 들어가도 입을 대지 않는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식사 때마다 일이 두배였다.

설거지 때도 육식을 하는 다른 가족의 수저와 따로 씻어줘야만 수저를 드는 그를 보고 주변 사람은 "저 아이는 중"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954년 부친의 권유대로 처음 부산 선암사를 찾던 날, 이상하게도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했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랬다. 그 길로 완전히 눌러앉아버렸다.

싫으면 당장 돌아와도 좋다던 부모님의 당부와는 달리 병역문제 때문에 두어번 외출한 것이 속가의 집을 찾은 전부였다.

행자생활부터 시작했다. 군불 때고, 밥 짓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그것부터가 공부였다. 하심(下心). 마음을 낮추는 공부. 수행의 근본이 거기에 있었다. 다른 행자도 두엇 더 있었지만 그중 스님으로 남은 건 혼자뿐이었다.

정신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힘든 수행생활에 중도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각한 인생번뇌를 토로하며 중이 되겠다고 찾아왔다가도 "도저히 새벽 3시 예불시간에 못 일어나겠다"고 나가는 사람도 종종 보았다. 천석꾼 집안의 아들이면서도 궂은 일을 묵묵히 견디는 그를 스님들은 기특해했다.

사실 그는 출가동기 자체도 독특한 케이스. 대개 실연이나 신상도피 등 속세에서 피치못할 사연을 안고 몸을 숨기듯 입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것도 불가에선 인연으로 보지만 말이다.

요즘이야 절집 살림 돌아가는 정도야 알게 됐지만 예전만 해도 너무 돈을 몰라서 탈이었다. 한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도무지 돈엔 욕심없는 그를 미덥다하고 주지스님이 금고를 맡겼다. 그런데 무심한 것도 너무 지나쳐서 결국 사고. 약삭빠른 도둑이 몽땅 털어가고 말았다. 칭찬이 꾸지람으로 바뀌었다.

해인사, 김룡사 등을 거쳐 1961년 지리산에 자리를 잡았다. 수행에 몰두하기엔 더없는 명당이었다. 옛날엔 이름난 대찰이었다가 6ㆍ25전쟁 때 화재를 입어 볼품없이 변한 벽송사. 주변에선 채 수습되지 않은 사람의 뼛조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빨치산의 유골이란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쓰인 곳이었다. 분단의 상처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통일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진 것도, 화엄경 사경을 생각해 낸 것도 바로 그때였다.

보릿고개의 어려움도 산사에서 겪었다. 초근목피로 어려운 때를 견뎠다. 직접 키운 감자를 내다팔아 쌀과 바꿔오던 시절도 있었다. 허물어진 절집 곳곳도 직접 고쳐가며 살았다.

전기불이 들어온 것도 약 20년전, 길이 닦인 것도 불과 10년전이다. 워낙 외진 산골이다보니 예전엔 이따금씩 산속에서 놀러나온 멧돼지, 노루와 만나기도 예사.


"정말 어려워진건 우리 마음"

그 원시적인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신선놀음이다. 지리산 그 골짜기에도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척척 자동차로 실어나를수 있고 조금만 눈이 내려도 길이 끊어지는 사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너무 편리한 건 때때로 너무 불편한 것보다도 더 나쁠 수도 있다.

잠시만 전기,수도가 끊어져도 속수무책으로 넋을 잃는 현대문명. 차라리 낙후되고 가진 게 없어서 원응스님은 언제나 유비무환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가 어려운 시절, 이웃들에게 드리는 법어 하나.

"부처님 말씀에 '지족이부'란 말이 있습니다. 족한 줄 아는 게 바로 부(富)라는 말입니다. 요즘 다들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정말 어려워진 건 경제상황이 아니라 우리 마음인 것 같습니다. 너무 약해지고 가난해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1960년대 보릿고개 때에 비하면 아직도 우린 아주 형편이 좋은 겁니다. 그 굶어죽을 고비도 넘기고 살아왔는데 이 정도로 벌써 절망하거나 좌절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청정한 지리산 공기탓일까? 스님의 마음은 아직도 해맑은 소년이다.

"유머도 많고 장난끼도 많아서 경내에서 인기가 최고"라고 동행한 벽송사 식구가 귀띔해준다. 그러면서도 서예 하나만큼은 철벽고집이다.

그의 글씨를 탐내는 손님마다 "연습글씨라도 하나 달라"고 부탁해도 "없다" 하고선 몰래 뒤꼍으로 나가 습작은 무조건 불태워 없애버리는, 부처님도 못말리는 장인이다.

화엄경 금니사경전은 2월27일부터 1주일간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열린다. 그 행사가 끝나고나면 다시 7시간동안 졸며 깨며 왔던 길을 되돌아 지리산 고향집으로 달려갈 노스님.

공양을 하다말고 누군가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스님에게 건네주자 그것을 거꾸로 받아든 채 스스럼없이 되묻는다.

"이거, 어느 쪽에 대고 말해야 돼?" 휴대폰 없이도 끄떡없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진짜 문명인이 법복을 입은 채 서울 한복판에서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2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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