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서대문(西大門) 로터리

서울 서대문(西大門:敦義門) 로터리는 의주로(義州路)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신문로(新門路), 서쪽으로는 충정로(忠正路)가 갈리는 로터리다.

이 일대는 옛날 조선조때 서부 반송방(盤松坊)의 평동(平洞), 경구고마동(京口雇馬洞), 경교동(京橋洞)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던 곳.

반송방에는 서지(西池) 또는 천연지(天然池)라 불리는 못이 있었는데 둘레가 넓고 물이 깊은데다가 연(蓮)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이 연못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西人)이 국권을 잡고 남쪽 연못의 연꽃이 무성하면 남인(南人)이 국권을 잡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연못 북서쪽에 그림 같은 천연정이 자리하고 그 밑에 기우제단이 있었다고 하나 천연지와 기우제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금화 초등학교가 들어서있다.

다만 '천연동'이란 땅이름이 옛 천연지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또 그 천연지 못가엔 세월의 풍상을 이고 서있는 소나무가 펀펀하게 생겼다하여 반송(盤松)이라 불렀다. 고려때 왕이 이따금 남경(서울)으로 거동하다가 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이름을 '반송정'(盤松亭)이라 하였다 한다. '반송방'이라는 땅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조가 개국하면서 이성계(李成桂)가 선대 4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서울로 모셔오면서 이 반송정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또 옛날부터 벗들이 반송정에 모여서 못의 연꽃을 구경하면서 노니다가 서로 전송하는 것이 하나의 운치였기에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인 '반송송객'(盤松送客)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평동'은 '거평동'이라 하여 서부 반송방의 동쪽 마을, 오늘날의 적십자병원 일대를 말한다.

'경구고마동'은 서대문 로터리 일대에 경기도 관찰사(觀察使ㆍ監司)의 관아(官衙)가 있었고, 그 경기관아 아래쪽에 다리를 두었는데 '경기다리-경곳다리-경구교- 경교(京橋)'로 된 것이다. 김구(金九)선생이 괴한에게 피살당한 집, 경교장(京橋莊:삼성병원내)도 이 '경교'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마동'은 경기관아 남쪽에 역마(驛馬)를 빌려주는 고마청(雇馬廳)에서 온 말이다. 고마청은 조선조 현종(顯宗)때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이 경기감사로 부임, 육우관(六郵館)을 세워 역마를 기르게 하고 또 말을 빌려주는 제도를 시행했던 곳이다.

그 고마청 자리가 조선조 초기 여진족을 정벌, 4군6진을 함경도에 설치하고 좌의정을 지낸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1390~1453년)의 생가터이기도 하다.

김종서 하면 무장(武將)쯤으로 알지만 실은 도총제(都摠制) 추(錘)의 아들로 태어나 태종 5년(1405년)에 당당히 문과에 급제, 상서원장(尙書院長)을 거쳐 행대감찰(行臺監察), 봉상판관(奉常判官), 함길도 관찰사를 지냈는가 하면 좌찬성 겸 춘추관으로서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등의 편찬에도 큰 공을 남긴 문관이었다.

성격이 엄정, 강직하고 밝은 문인으로서 불의와는 타협이 되질 않아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는 것에 분노, 맞서다가 의롭게 죽었다.

'돈의(敦義)'! '의(義)를 두텁게(敦) 한다'는 그 뜻처럼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밖은 의주로 통하는 의주로(義州路)가 있는가 하면, 불의에 맞서 의롭게 죽은 김종서의 집터, 불의에 항거한 4ㆍ19의거(義擧)동지회, 일제의 불의에 맞서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의 시호를 딴 충정로(忠正路)가 있다.

또 평생을 민족운동을 하다 구국과 의(義)의 일념으로 죽은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서거한 것(경교장)도 돈의문 밖에 있으니, 돈의문의 '의'(義)와 무슨 걸림이라도 있는 듯 온통 '의'자로 얼룩진 땅이다.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1/03/0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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