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미국을 팔아먹었나?

이중 스파이 로버트 필립 핸슨, 15년간 활동

배신자는 거꾸로 배신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15년간 이중 스파이로 살아온 로버트 필립 핸슨에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이중 스파이 게임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한 시점으로부터 겨우 5주일을 앞두고.

일요일이었던 2월18일 오후 8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 10여명은 암호명 '엘리스'로 불리는, 버지니아주 한적한 교외 다리 아래의 비밀장소로 핸슨이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은 그가 훔친 미국의 비밀 문서를 숨겨두면 러시아의 SVR(구 KGB) 요원이 찾아가는 비밀 접선장소다. 얼마 후 핸슨이 숲속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내자 FBI 요원들은 그를 덮쳤다.

FBI측은 핸슨이 숨겨놓은 접선 봉투를 찾아냈다. 거기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앨링턴 부근에선 다른 FBI 팀이 '루위스'로 불리는 접선장소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가 아직 챙겨가지 못한 SVR측의 비밀봉투가 숨겨져 있는 곳이다. 봉투에는 100달러짜리로 5만 달러가 들어있었다. 그가 비밀 문건을 넘겨준 대가로 받는 돈이다.

그러나 러시아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의 이중스파이 운용계획 모스크바에 넘겨

미국의 정보기관은 핸슨이 지금까지 미국의 이중 스파이 운용계획과 KGB의 CIA요원 공작, KGB 활동 분석 보고서 등 6,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비밀 문건을 모스크바측에 넘긴 것으로 보고 있다. 타임은 검찰조서와 자체 취재를 통해 핸슨의 이중 스파이 생활을 재구성했다.

핸슨의 위장술은 뛰어났다. 그는 버지니아주 교외에 사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가끔 밤중에 개를 데리고 인근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목격했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는 매주 일요일 가족과 함께 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교인이었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 좋은 아버지, 노모에겐 효자였다.

핸슨은 그러나 FBI에선 이중 스파이 활동을 하기에 적절한 위치에 있었다. 비교적 늦게(32세) FBI에 들어간 그는 무려 25년간 FBI에서는 '음지'(Dark Side)로 불리는 국가안보부서(NSD, 조직내 이중 스파이를 색출하는 부서)에서 근무했다. NSD는 다들 기피하는 부서였다.

핸슨은 영국의 유명한 이중 첩자였던 킴 필비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모스크바로 보낸 비밀 쪽지에서 "나는 14세때 이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필비의 책을 읽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필비 자서전은 핸슨이 24세가 되던 1968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1978년~1981년과 1985년~1987년 핸슨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는 그가 동료들이나 상관보다 뛰어나다고 설치는 바람에 왕따를 당했다고 기억했다. 또 병색의 얼굴과 검은 머리, 검은 양복, 경직된 말투 때문에 '닥터 데스'(Dr. Death)'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FBI 고급정보 자유롭게 검색

핸슨은 뛰어난 정보요원이었다. 그는 컴퓨터 전문가로 FBI 요원 및 정보원의 본명, 주소, 취미 등 신상명세는 물론 이중 스파이의 정보까지 컴퓨터화하는 정보추적시스템의 구축을 맡았다.

이때 그는 뉴욕에 있는 FBI 정보원들의 실체를 접하게 됐다. 그는 또 소련 관리들에 대한 감시 카메라 작동과 전자추적을 담당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특히 1981년~1985년, 그리고 1987년부터 체포될 때까지 워싱턴의 FBI 본부에 근무하면서 비밀 정보원 신상명세와 접촉 방법, 비밀작전계획 등 각종 고급 비밀을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었다. 이중 스파이짓을 하기엔 그보다 더 좋은 보직이 없다고 한 수사관은 털어놓았다.

핸슨이 KGB와 접촉한 것은 1985년 10월 4일. 그는 워싱턴에 있는 KGB 총책인 빅토르 체르카쉰 대령의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체르카쉰은 1994년 간첩혐의로 체포된 CIA요원 알드리치 에임스의 배후조종자.

발신인 B의 이름으로 된 그의 편지엔 미국의 비밀 문건을 10만 달러에 팔겠으며 그같은 거래를 계속하고 싶다는 의사가 담겨있었다. B는 자신이 제공하는 정보는 확실한 것이라며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미국을 위해 일하는 KGB 이중간첩 3명의 이름도 적었다. 3명은 그 후 모스크바로 소환됐고 2명은 처형됐다.

이렇게 시작된 B와 KGB와의 거래는 1991년 12월까지 계속됐다. B는 체포될 때까지 현금 60만 달러와 다이어몬드 3개를 받았다. 조직내 이중 스파이를 색출하는 방첩요원답게 핸슨은 '배신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철저히 익명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B, 나중에는 라몬 가르시아, 짐 베이커와 같은 이름을 도용했다.

러시아측은 그를 항상 '디어 프렌드'(Dear Friend)라 불렀다. 그는 모스크바측에서 좀더 복잡한 접선 방법을 제의했을 때 "나의 경험상 가장 손쉬운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거절했다. 해외에서 한번 만나자는 제의도 역시 거절했다.

B는 1991년 갑자기 모스크바와 관계를 끊었다. 이유는 두가지. 우선 FBI와 CIA가 일련의 비밀작전이 사전에 밖으로 유출되자 1992년 비밀리에 뒷조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뒷조사는 1994년 CIA의 고정간첩 에임스, 1996년 CIA 소속의 해롤드 니콜슨, FBI 요원 얼 피츠의 체포라는 성과를 거뒀다. 핸슨은 자신의 혐의가 풀린 것을 확인한 1996년 7월 다시 러시아측과 접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러시아측에서는 이미 담당자가 바뀌어 B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1999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쪽지가 왔다. 거기에는 "디어 프렌드, 잘 오셨소. 당신이 아직도 여기에 있다니 다행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양측의 거래는 재개됐지만 핸슨은 늘 불안에 떨었다. 모스크바측으로 보낸 2000년 3월의 편지엔 "당신네들을 도우려다 희생될 것 같다"는 심경을 적었고 그해 11월에는 "은퇴하면 모스크바에 가 스파이교육을 시키겠다. 그때까지 행운을 빌어주시오"라고 쓰기도 했다.


비밀문건 봉투 입수, 추적에 들어가

CIA와 FBI는 에임스 등의 체포가 1980년대와 1990년대 비밀작전의 실패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조직내 뒷조사를 계속했다.

조사의 초점이 FBI쪽으로 옮겨졌다. 우선 양 기관 합동 비밀작전에 대한 정보를 취급하는 NSD부서 요원에 대한 신원조회가 이뤄졌고 핸슨도 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는 호화생활도 하지 않았고 술과 도박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가 조국을 팔아먹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2000년 가을. 마침내 단서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러시아측에 돈을 받고 판 비밀자료의 봉투를 러시아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것.

FBI팀은 봉투에서 두개의 지문을 채취해 모든 요원의 개인 파일과 대조했다. 로버트 필립 핸슨의 것이었다. 두번째 단서는 1986년 8월에 녹음된 전화 녹음 테이프였다. 알렉산드르 페렐로프라 불리는 러시아 요원과 B와의 전화통화 내용.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핸슨이었다.

FBI는 핸슨을 집중 감시했다. 그리고 그의 팜 컴퓨터로 들어온 메시지를 가까스로 해독, 비밀장소를 들락거리는 그를 추적했다.

2월12일엔 암호명 '루위스'인 접선장소에서 5만 달러가 든 돈봉투를 찾아내 포위망을 더욱 좁혔다. 그리고 18일 암호명 '엘리스'에서 핸슨을 덮쳐 비밀문건이 든 봉투를 압수했다.

FBI 요원들은 그가 왜 이중 스파이짓을 했는지 궁금해한다. 돈이 필요해서? 그가 이중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던 1985년엔 사실 방첩요원의 월급이 적었다. 아니면 그가 홧김에? 핸슨은 자신을 왕따시키는 조직에 본때를 보여준 것일까? 아니면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일까?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3/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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