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공조] 공조 '큰 틀'만 확인… 절반의 성과

북미관계 개선 요구에 냉랭한 반응

"부시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우려가 무엇인지 파악했기 때문에 앞으로 정부 정책에 참고도 하고, 북한에도 전달할 생각입니다."

5박6일의 방미 일정을 마치고 3월11일 오후 서울 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은 귀국보고를 통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받은 충격의 단면을 우회적으로 털어놓았다.

부시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회의감을 언급하는 김 대통령의 표정에는 6일 방미길에 오를 때의 결연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움과 착잡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5일 전 서울공항을 떠날 때 김 대통령의 마음 한자락에는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유도하겠다는 각오가 자리잡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의 변화의지를 설명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했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부시 대통령은 김 대통령의 말을 끊으면서까지 북한에 대한 엄격한 상호주의 적용과 북한의 핵ㆍ미사일 투명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강조함으로써 김 대통령의 노력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북미 관계에 대한 양국간 의견조정은 이제부터 협의하고자 한다"는 귀국보고는 사실상 김 대통령의 구상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 '회담 성공' 자평 불구 아쉬움 남아

"한미간의 대북 인식차가 부각되면서 회담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빛을 바랬을 뿐이다. 두 정상이 첫 만남에서 이룬 합의는 우리의 기대를 충분히 반영하고도 남는다." 사실 8일 새벽(한국시간) 정상회담 후 나온 한미 공동발표문만 두고 보자면 정부 당국자들이 이번 회담을 성공적이라고 자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미 동맹관계와 남북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도적 역할 재확인한 것에 더해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끌어낸 것은 이번 회담의 큰 성과였다.

더구나 제네바 핵 합의에 대한 미국측의 이행의지를 확인하고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문제에 대한 논란을 잠재운 것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 대통령도 이런 결과에 대해 "당초 설정했던 방미 목적이 성취된 것"이라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드러난 부시 행정부의 대북관은 당국자들의 자찬이나 김 대통령의 만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에 대한 회의감을 표출하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북한을 전제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발표문이 대북정책의 보증서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목소리를 한미간 정책 이견으로 연결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을 대하는 정서적 차이와 정책의 우선순위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엄밀히 말해 한미가 똑같은 대북 인식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며 "남북간 화해ㆍ협력, 냉전해체의 측면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와 세계전략적 차원에서 핵ㆍ미사일 문제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꼽고 있는 미국과의 사이에 대북 인식의 수준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다뤄야 할 사안과 미 정부의 주된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음에 따라 대북 상호주의의 개념도 차원을 달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미국이 대북 상호주의와 검증을 말할 때의 지향점과 우리가 상호주의를 언급할 때의 맥락은 다른 차원인데도 같은 선상에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국자들은 이런 견해차는 한미 동맹관계가 공고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김하중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대북 문제에 대해 미국이 갖고 있는 의구심이나 검증 요구는 앞으로 미국의 외교안보 진용이 제대로 짜여지면 해결될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핵ㆍ미사일 접근법과 우리의 대북 화해ㆍ협력 정책은 완전히 따로 설정된 트랙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쪽이 쳐질 때 다른 한쪽을 제어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전진의 속도를 더디게 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한미가 대북 인식에 있어 공통분모를 찾는 것은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가 상호보완적으로 상승작용을 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 하에서는 양국이 적어도 "북한은 변하고 있고 또 변화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대북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진전의 보조를 맞추었던 게 사실이다.


향후 북미. 남북관계에 변화 예상

이런 점에서 "북한은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전제 아래 제네바 핵합의의 재검토를 천명하고 북한의 재래식 전력 감축 문제까지 북미 협상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향후 북미 관계는 물론 남북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북한의 과거핵 규명을 명분으로 제네바 핵합의에 수정을 가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할 경우 북한의 강경한 대응을 불러옴으로써 한반도 안정기조가 뿌리채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 미국이 재래식 전력 감축 문제를 미사일 협상과 연계, 남북간 신뢰구축 차원에서 풀어가려는 우리 정부의 입장에 제동을 걸 경우 한미간의 마찰로 이어질 수 있다.

NMD 문제도 여전히 잠복 변수다. 김 대통령은 "한러 공동성명에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의 개정ㆍ강화'란 조항이 안들어가는 게 좋았다"고 적극 해명, 한국 정부가 NMD 문제에서 러시아를 편들었다는 오해를 어느 정도 불식시켰다.

하지만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터진 NMD 논란은 결과적으로 향후 미국의 NMD 동참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 정부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다른 이해당사자인 중국 러시아 등과의 관계에도 외교적 부담을 주고 있다.

특히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더이상 NMD 체제와 전역미사일방어(TMD) 체제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듯 미국이 NMD 체제를 동북아 TMD 체제로까지 확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주한 미군의 안전을 명분으로 우리의 TMD 참여를 강요할 경우 이미 "TMD 구상은 우리 안보상 개념에 적절치 않다"고 밝힌 정부의 입장과 충돌할 소지를 안고 있다. 게다가 미국이 NMD 구축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북한의 미사일 도발 가능성을 강조하게 될 경우 북미 관계는 앞길을 장담할 수 없는 안개 국면으로 빠져들 수 있다.

미국의 대북 불신을 해소하고 대북정책의 공조를 이어가기 위한 해법으로 김 대통령은 '포괄적 상호주의'와 '역할분담론'을 제시했다.

북한의 제네바 핵합의 준수, 미사일 포기, 무력도발 포기와 북한에 대한 한미의 안전보장, 경제협력, 차관지원을 맞바꾸려는 김 대통령의 구상은 북미간에 대화를 유도하는 현실적인 제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상이 추진의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대북정책의 우선순위와 대북 검증의 강도에 대한 한미간의 완전한 합의가 따라야 한다. 북한이 이 제안을 수용할 지도 미지수다.


대북정책, 한미간 완전합의 뒤따라야

또 핵 ㆍ미사일 문제는 과거처럼 미국이 맡고 재래식 무기 감축 문제는 한국이 맡는 역할 분담이 이뤄지더라도 상호진전의 보폭을 맞추지 못할 경우 한미 관계를 비틀거리게 하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 관계자는 "한미간의 대북 인식의 격차는 향후 대북정책 조율이 더욱 중요해 졌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며 "한미간 대북 정책 공조에 클린턴 정부 때와는 다른 새로운 좌표 설정이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승일 정치부 차장

입력시간 2001/03/1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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