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벼랑 끝 승부 '불상파괴'

탈레반 정권, 국제사회 고립에
유적폭파로 맞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접경지역의 간다라. 인더스강 지류인 카불강 하류에 위치한 이 지역은 기원전후에서 5세기경까지 불교문명이 찬란하게 꽃핀 곳이다.

"초목이 한 그루도 없고 마치 불에 탄 산 같다"고 신라 스님 혜초는 적었고, 혜초 보다 50여년 먼저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였던 이곳을 들른 현장법사는 대불들이 누렇게 황금칠을 하고 보석이 찬란했다고 감탄했다.

인도에서 불교가 생긴 후 보리수 등으로 상징화됐던 불타의 모습이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벌 이후 헬레니즘 양식이 가미돼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을 닮은 불상으로 거듭난 것이다.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데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생김새를 보면 영락없는 인간 그 자체이다.


세계 최대 불가사의 중 하나, 로켓포 등으로 폭파

2세기경 이 지역을 통치했던 인도 쿠샨 왕조가 꽃피운 간다라 불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125㎞ 떨어진 바미안의 사암(沙巖) 절벽에 새겨진 각각 높이 53m, 37m 짜리 두 석불이다.

이 가운데 53m 짜리는 당연히 세계 최대 부처 입석상. 승려들이 계곡의 일부를 고통스럽게 깎아 만든 이 두 석불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곳에서 융성한 마애석불 양식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경주 두대리 마애석불 등 갖가지 석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내전속에서 1998년 바미안을 접수한 집권 탈레반 정권은 37m짜리 불상의 머리를 파괴했고, 이번에는 우상을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를 들먹이며 최대 불상마저 부숴버리겠다고 나섰다.

쿠드라툴라 자말 탈레반 정보문화장관은 최근 "바미안의 마애석불 2개가 거의 부스러기로 변했다"면서 "헤라트와 가즈니, 카불 등에 있는 불상의 파괴 작업도 3분의 2 이상 진행됐다"고 밝혔다.

아프간 이슬람통신(AIP)도 강력한 폭발물이 불상의 머리를 날려버렸다고 보도했다. 탈레반은 불상 폭파작업에 다이너마이트 외에 로켓포, 탱크, 화약, 해머, 삽 등 각종 화기와 도구를 총동원하고 있으며, 바미안 지역의 경우에는 민간인 출입마저 통제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책없어 발만 동동

탈레반의 불상파괴에 국제사회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동남아시아 불교권 국가는 물론이고 이슬람권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만 아직껏 마땅한 방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탈레반의 최고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는 폭파작업을 중단하는 대신 바미안 석불 앞에 거대한 콘크리트 벽을 세우자는 국제사회의 제의마저 거절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측이 불상을 사들이겠다고 하자 탈레반은 대뜸 "미친 소리"라고 반응했다.

탈레반 정권과 가장 가까운 동맹국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집트 등 이슬람권 조차 불교 유적 보존을 요구하고 있지만 탈레반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눈치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3월 6일 탈레반의 불상 파괴를 문화유산에 대한 '무자비하고, 납득할 수 없는' 폭력행위라고 규탄했지만, 그 이상의 대응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탈레반은 왜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불상 파괴를 강행하는가. "신은 하나이며 조각상을 숭배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밝힌 오마르의 포고령을 상기하면, 이번 불상 파괴는 종교 및 사상적 증오심에서 유발된 조직적인 우상파괴 행위로 보인다.

탈레반 정부는 과거에도 여성의 취업 금지, 죄인 공개 처형 및 수족 절단, 여학생의 등교 금지 등 전통 이슬람 규율을 강요해 왔다. 국제사회가 눈살을 찌푸린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미국 유엔의 압박에 정면 승부

의아한 것은 탈레반 정권이 2개월 전만 해도 유적 보호를 위해 국제사회와 협력하겠다고 공언했다는 점.

이와 관련, 탈레반 정부를 인정하는 나라 중 하나인 파키스탄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테러리즘과 마약 지지국이라는 낙인을 찍어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의 집요한 고립 전략에 아프가니스탄이 좌절했기 때문이라고 파키스탄측은 해석했다.

유엔은 지난해 12월 탈레반이 테러배후 세력인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인도를 거부하자 무기 금수 및 비행 금지 등 10개항의 제재조치를 단행했다. 탈레반 정부는 지난해 아편재배 금지령을 내렸지만, 미국과 유엔은 그 실효성에 의혹을 보이며 탈레반에 대한 압박 강도를 완화하지 않았다.

지난 20여년간 전쟁을 겪은 데다 가뭄, 식량난, 난민 문제로 그 어느 때 보다 국제사회의 원조가 절실한 탈레반이 마침내 '문화 파괴'라는 무기로 국제사회와 정면 승부에 나선 셈이다.

어느 아프간 주민은 "불상 파괴가 설령 잘못된 일이라 해도 탈레반만을 탓해서는 안된다"면서 "탈레반을 너무 벽으로 몰았다"고 말해 국제사회를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은 불상파괴가 이슬람 법규에 따른 것이라는 탈레반의 주장이 옹색하다는 입장이다. 이집트의 고위 이슬람 성직자인 나사르 파리드 와셀은 "이슬람의 교리가 조각상을 파괴하라고 규정하진 않았다"면서 "고대 불상은 역사의 기록일 뿐이며, 이슬람 신앙심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탈레반 지도자들을 대거 배출한 이슬람신학교 마드라사 하가니아측은 "불상 파괴보다는 차라리 가뭄과 식량난에 시달리는 아프간 주민을 위해 불상 매각이 낫다"고 말했다.

이슬라마바드의 언론인 하산 칼레미는 "탈레반이 모하메트의 후계자들 보다 이슬람을 더 잘 알고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이집트, 이란의 이슬람 정복자들도 스핑크스 등 이교도의 조각상을 그냥 내버려 뒀다고 말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의 불교 유적지 파괴 행위는 종교라는 이름 아래 폭력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탈레반의 반문화적 행위는 그 어떠한 변명과 주장을 하더라도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더욱이 지금은 숭배의 대상물로 기능하지도 않는 불상을 교리의 잣대로 획일화하는 자세는 위험천만한 사고임에 틀림없다. 문화유산은 특정시대나 국가의 소유물이 아닌 인류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준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14 22:04


이동준 국제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