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의 반란] 통념에 도전하는 딸

남성중심 종중재산 분배ㆍ호주제에 반기

'출가외인'(出嫁外人)의 통념이 깨지고 있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가 친정의 종중문제까지 개입하는 것은 아직은 여전히 예외에 속한다. 아내가 남편을 제쳐두고 가정을 대표한다고 해서 말릴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를 제쳐놓고 자신의 성(姓)을 자녀에 물려주려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모든 통념은 언젠가 도전받는다. 동성동본 불혼의 통념이 깨진 것이 그렇다. 통념을 깨기 위해 법적 투쟁을 불사하는 여성이 있다. 종중재산에 대한 권리와 호주제 개폐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계순씨는 최근 3년간 여자로 태어난 설움을 단단히 겪고 있다. 나이 오십에 2남1녀의 어머니. 시집간지 30년이 다 되가는 농부의 아내로 친정 집안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씨는 덕분에 '장'(長)자가 붙은 직함을 두개나 갖게 됐다. '성주 이씨 안변공 성복파 여자종원회'회장과 '한국여성권리수호대책위원회' 위원장이 그것이다.


"땅 판 돈 왜 남자들끼리만 나눠갖나"

이씨는 자신의 뿌리와 싸우고 있다. 친정이 속한 가문, 즉 성주 이씨 안변공 성복파가 상대다. 성복파는 성주 이씨 대종(大宗)속의 한 파벌인 안변공파에서 다시 가지를 벌려나간 소종중이다. 그렇다고 이씨가 성복파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안변공 성복파 종중을 대표하는 조직인 종회(宗會), 좀 더 구체적으로는 종회의 남자회원들과 싸우고 있다.

싸움의 발단은 그리 고상하지 않다. 400여년 내려온 종중 땅이 문제였다. 종중 땅의 소재지는 난개발의 상징이 된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성복리. 이 지역의 종중 땅을 팔고 그 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곳의 성복파 종중 소유 임야와 논밭은 약 15만평. 이중 10여만평이 평당 150만~200만원에 팔렸다. 개발붐이 불기 전엔 나뒹굴던 땅이 일약 1,500억원이 넘는 금덩이로 변했다.

성복파 종회는 판매액 중 일부를 2차례에 걸쳐 20세 이상 남자 종원 267명에 분배했다. 자격에 따라 적게는 2,000만원, 많게는 1억8,000만원까지 받았다. 분배가 완료되면 최고 4억원까지 받게 된다.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여자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이씨가 종회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여자도 남자와 똑 같은 이씨 자손이고 그런만큼 종중재산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이씨가 처음부터 자격을 운운하며 돈 분배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집안인데 정을 생각해서라도 조금씩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종회측은 딱 잘라 거절했다.

'출가외인인데 무슨 소리냐'는 태도였다. 이씨는 화가 났다. 말이 종친이지 종사(宗事)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던 사람까지 돈을 분배받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밀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씨를 화나게 한 것은 또 있었다. 자신이 돈을 요구하자 종회측이 종약(宗約)을 개정해버린 것.

종회측은 1985년 종약제정시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로 했던 종원자격을 1999년 '만 20세 이상 남자'로 바꿨다. 당초 종약에 따르면 결혼에 관계없이 여자도 돈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씨는 자신이 돈 분배를 거론한 직후 종약을 바꾼데는 의도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분배 몫을 늘리기 위한 남자들의 속셈이 깔려있다는 이야기다.

종중내에서도 집집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아들이 많은 집은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12명이 돈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 반면 아들이 없거나 죽은 집은 낭패를 보았다. 딸만 낳은데다 남편이 죽은 사람은 눈을 뻔히 뜨고도 한푼도 못받았다.


딸들 소송에 종회측 "집안망신" 펄쩍

사정이 이렇자 이씨의 주장에 결혼한 성주 이씨 집안의 딸들이 동조했다. 26명이 합세해 지난해 3월 수원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종회를 상대로 한 '종약변경 무효소송'이었다. 종회측은 들끓었다. 집안망신이라며 험한 말이 쏟아졌다. 딸과 친정사이도 나빠졌다. "친정재산 넘본다"는 식으로 취급당하는 딸들이 많아졌다.

시누이와는 물론이고 오빠ㆍ동생과 말다툼이 일거나 칼부림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1심은 패소했다. '관습법상 여자는 종원자격이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원용됐다. 이씨는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동참한 기혼여성도 74명으로 늘어나 '여자종원회'가 구성됐다.

이씨는 회원들이 60만원씩 갹출한 돈으로 소송비용과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다. 이씨는 "지금까지 친정집안과 시집집안에서 들은 욕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편이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지만 거들지 못한 지가 3년째다. 시집에서도 이젠 '알아서 하라'며 손 들었다.

결혼한 여성이 친정 문중을 상대로 재산분배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씨가 처음이다. 물꼬가 트이자 이씨 주변에 다른 문중의 여성도 모여들었다. 청송 심씨, 용인 이씨, 전주 최씨, 광산 김씨 출신의 결혼한 여성들이다.

이들이 합세해 '한국여성권리수호대책위'가 만들어졌다. 현재 청송 심씨는 1심 패소 후 항소중이고, 용인 이씨는 1심 계류중이다. 나머지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씨에 따르면 이밖에 반남 박씨도 소송을 준비중이다.

이들 문중이 한결같이 여자에 분배권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미성년 아들을 포함해 딸과 며느리에게도 일정액을 분배한 문중도 있다. 어떤 문중에서는 돈을 받기 위해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아이를 조기분만한 사례도 있었다. 여자에게 몫을 떼준 배경에는 증여세 절감 의도도 있다는 것이 이씨의 추정이다.

이씨는 종회측이 최근 여성회원에게 1,000만원씩 주겠다며 타협책을 제시했으나 거절했다. 액수가 불공평하기도 하지만 악이 받혔기 때문이다. 이젠 투쟁의 대상이 종회가 아니라 여성에 불평등한 법체계로 확대됐다.

고등법원에서 다시 지더라도 대법원으로 가고 여기서 지면 헌법소원까지 하겠다는 것이 이씨의 작심이다. 시대에 안맞는 법과 통념을 깨겠다는 결심이다.


여성 불평등과의 싸움으로 번져

유림의 본산인 성균관측의 한 관계자는 이같은 송사에 대해 "법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누대로 내려온 종중재산을 팔아 나눠가지는 사실 자체를 비난했다.

"불가피한 사유로 종중재산을 팔더라도 나눠가지는 것은 말이 안된다. 종중재산은 문중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팔았다면 기금으로 적립해 문중 대소사와 장학금 등으로 쓰는 것이 옳다."

송사와 무관한 한 용인시민의 이야기가 의미있다. "안주겠다는 종중측이나 무슨 수를 써도 받겠다는 여자나 모두 똑같다. 돈이면 집안이고 뭐고 없다는 것 아니냐. 없던 종회를 만들어 조상 땅을 팔아치운 탓에 지금 용인이 이 모양으로 난개발됐다. 조상을 끌어다 자기 주장을 하고 있지만 모두가 조상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 한심하다."

호주제 개폐주장 역시 종중재산 분배요구와 마찬가지로 남성중심의 사회통념에 도전하고 있다.

호주제 개폐주장은 그러나 돈을 매개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정법상의 문제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호주제를 문제삼은 소송은 지난해 이후 13건이 제기됐다. 제소한 여성들은 현행법으로 안된다면 헌법소원을 통해서라도 끝장을 보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호주제 관련 소송은 재산상의 불이익을 비롯한 유형적 손실을 전제하지 않는다. 부계 위주의 법체계로 인해 초래되는 여성, 특히 이혼여성의 정신적 고통이 문제된다. 현행 민법은 1990년 개정을 통해 재산상속권 등에서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없앴다.

따라서 현재 호주제 개폐주장은 남성중심의 사회적 관습이나 이데올로기 혁파를 겨냥하고 있다.

대표적인 소송 사유는 이혼여성의 친자녀 입적문제. 최근 이혼여성 5명은 자신의 호적에 자녀를 올릴 수 있게 해달라며 관할구청을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재판부의 기각사유는 '민법은 남성 우선적 호주승계 순위 및 부가(父家) 우선 입적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자녀를 어머니 호적에 올릴 수 없다'는 것. 민법은 호주가 사망할 경우 아들, 손자, 미혼인 딸, 배우자, 어머니 순으로 호주승계 순위를 정하고 있다.

아울러 이혼한 여성은 이전 호적, 즉 친정의 호적으로 복귀하거나 1인1호적을 창설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부모가 이혼할 경우 자녀는 당연히 아버지의 호적에 남게 된다. 이에 따라 이혼한 여성이 친자녀를 양육하더라도 자녀는 자신의 호적이 아닌 전남편의 호적에 등재돼 있게 된다.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는 주민등록상 동거인에 불과하다. 재혼하지 않더라도 승계순위에 밀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호적에 오르게 된다.


호주제 불합리성에 여성들 불만

여성들의 불만을 들어보자. 재혼한 주부 P(43)씨의 이야기. "이혼 뒤 전남편과 사이에 난 아이를 데리고 재혼했다. 재혼해서 아이를 한명 더 낳았다.

현재 남편이 전남편의 아이를 호적에 올리고 성도 바꾸기를 원하지만 법적으로 불가능해 비참함을 느낀다." 재혼을 않고 있는 J(35)씨도 법의 불합리함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이혼하고 친권과 양육권을 받았는데도 아이들을 내 호적으로 옮길 수 없다. 같이 사는 아이들은 주민등록상 동거인으로 돼 있다. 자녀와 나의 문제를 왜 법으로 강제하나."

민법상 호주제도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을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가족구성원은 모두 호주를 중심으로 그 상호관계를 기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가족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혼과 재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이 구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해체된 가족의 테두리 속에 존재하는 모순점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호주제도에 대한 극단적인 반론은 성씨(姓氏)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자녀가 반드시 아버지의 성을 따라야 하는데 대한 의문이다. 여성연합을 비롯한 여권단체들은 부계혈통 우선의 민법 조항이 남성 우위의 주종관계를 제도화, 고착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의 김기선미(그녀는 부모의 성을 모두 따서 쓰고 있다. 물론 공문서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정책국장의 이야기.

"호주제는 헌법상 남녀평등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전통 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남아선호와 이에 따른 태아 성감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호주제 폐지에 대해 성균관은 강경한 반대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성균관 가족법대책위의 이승관 상임위원은 "소수여성의 사사로운 감정과 급진적 사상 때문에 전통적인 뿌리사상을 말소하는 것은 안된다"고 강조했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하고, 이것이 부정되면 사회적ㆍ개인적 정체성 혼란이 온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소수여성의 현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예외조항을 두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종중재산권 분배와 호주제의 장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하지만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영역에 여성이 도전장을 던졌다는 점에서 이들 소송의 사회적 의의는 크다. 이데올로기와 제도, 법에는 사회적 파워게임이 개재돼 있다는 논리가 새삼스럽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21 20:21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