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종로구 한양골

'운니ㆍ경운ㆍ익선ㆍ낙원ㆍ돈의동'

'한양(漢陽) 천리 떠나간들/ 너를 어이 잊을소냐/ 춘향아 울지마라..' 대중가요 '춘향가'에 나오는 귀절이다. 여기서 한양은 물론 서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진짜 한양은 서울 어디쯤일까?

조선조에서 서울을 '한양'(漢陽)이라 불렀고, 조선조 말에 와서 한양을 '한성'(漢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한성을 일제가 우리 국토를 유린하면서 한성의 머리 글자인 '한'(漢)자를 없애고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의 꼬리 글자인 '경'(京)자를 갖다가 짜집기로 창지개명(創地改名)한 것이 '경성'(京城)이었다.

그래서 오늘날도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경인선, 경춘선 등 철도의 이름이라거나, '경평'(京平:서울ㆍ평양)축구, 또 근래에 와서도 경부고속도로, 경인고속도, 경춘가도 하며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일제의 찌꺼기인 '경'자가 붙어다니는 것이다.

물론 동양에서 수도의 이름에 남경, 중경, 송경, 동경, 서경, 북경 등 '경'자가 붙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결코 머리글자에 '경'자가 붙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최고 명당지인 경복궁과 창덕궁을 제외하면 풍수지리상 익선동을 중심으로 운니동, 경운동, 돈의동, 낙원동 일대가 양기풍수지(陽基風水地)라는 것. 그래서 이 일대를 두고 옛날부터 '한양' 또는 '한양골'이라 불렀다.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과 창덕궁의 주산인 응봉을 연결하는 선의 남측면으로, 양지바른데다가 물 또한 잘 빠져나가고 남산의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궁궐이 또한 가까이 있다보니 권문세가들이 모여살면서 서울의 북촌(北村)을 이뤘던 곳이다.

'한양'이란 땅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때부터다.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755년, 우리 땅이름을 당(唐)나라 식으로 고치면서부터다.

여기서 '한'(漢)은 물론 한강이다. 또한 양(陽)은 음양(陰陽)의 양으로, 풍수에서는 산의 남쪽을 양, 물의 북쪽을 양이라 한다. 산의 남쪽은 양지바르므로 마땅히 양이지만 물의 북쪽이 양이 되는 이유는 물이 동출서류(東出西流)할 때, 북이 남이 되고 남이 오히려 북이 되는 것이다.

또 고려 때도 한양은 고을 터로 자리잡고 있었다. 익선동을 중심으로 '한동' 또는 '한양골'이라 하였으니 '그 때 이미 서울(南京)에 신궁을 건설하였다'(是歲創新宮于南京)는 고려사의 기록이 보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조선조 말엽에 들어 이 한양골에서 몇몇 제왕이 배출된다. 조선조 23대 왕 순조는 원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네살에 세자 책봉까지 되었으나 불행히도 22세에 세상을 뜨고 만다. 뒷날 문조로 추존은 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문조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24대 헌종. 그러나 그 역시 23세에 후사없이 요절하고 만다.

때는 안동 김씨의 막강한 세도정치 시절이었다. 그래서 대통을 이을 왕손을 안동 김씨들이 수소문으로 찾아내 왕위에 앉힌 사람이 이른바 '강화도령' 철종(25대)이었다.

철종이 태어난 곳이 중부 경신방(오늘날 익선동)으로 그는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이면서 전계대원조의 셋째 아들이다. (철종이 '강화도령'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그의 할아버지 은언군이 천주교 박해에 연류돼 강화도로 피난가 있으면서 손자(철종)를 강화도에 홀로 두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종도 33세에 후사없이 승하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구름재(雲峴:운니동)에 살던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었으니., 조선왕조에 있어서 한양 고을은 불운의 재왕만 배출 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양(漢陽)이 한양(恨陽)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1/03/27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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