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망대] 미·일發 먹구름에 수심 가득

어릴 적에 찢어지게 가난한 삶이 싫어 소를 판 아버지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 국내 최고의 기업을 일궜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지난주 영면했다.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하나로 그리스 선주를 꼬셔 20만톤급 유조선을 수주하고 6ㆍ25전쟁중 엄동설한에 방한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위해 부산 유엔군 묘지에 보리를 옮겨심어 파란 분위기를 연출했던 정 회장.


정주영 전 회장 타계, '리틀 현대'로 재편

그는 한강의 기적을 창출한 재계의 거인이자 숱한 신화를 창출한 영웅이었다. 한국 최고의 기업가로 평가받는 정 회장은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함께 경제불모지에 말뚝박고 씨앗을 뿌려 한국을 절대빈곤국가에서 탈출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맨손으로 조선, 자동차, 중공업 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그의 왕성한 창업정신과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은 불굴의 정신 등은 후배 경영자들이 본받아야 할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있다.

물론 조직을 키우지 않는 불도저식 원맨경영과 황제경영 등의 부정적 유산은 답습해서는 안되지만.

현대는 정 회장의 타계를 계기로 경영권을 둘러싸고 왕자의 난을 벌였던 2세들의 분할경영이 가속화할 전망이다. 현대는 정 회장의 사후 2세대인 '3몽(夢)'이 제각각 딴 살림을 차리면서 핵분열의 길을 걷고 있다.

정몽구(MK) 현대차 회장의 자동차계열, 정몽헌(MH) 현대아산 회장의 건설 계열, 정몽준(MJ) 현대중공업 고문의 중공업계열 등 3개의 '리틀 현대'로 쪼개지고 있는 것이다.

MK, MJ는 자동차와 중공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고 유동성도 괜찮은 편이어서 그나마 봄햇살이 비치고 있다.

그러나 MH는 건설 등이 유동성위기를 겪으면서 경영권을 빼앗기느냐, 고수하느냐 하는 중요한 시련기를 맞고 있다. '왕회장(정주영 회장)'이 물꼬를 텄던 금강산 관광사업도 건설의 자금난으로 독자적인 사업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정 회장의 타계에 따른 추모행렬도 잠시, 한국 경제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세계 경제의 기관차 미국 경제의 경착륙 우려감이 확산되고, 일본발 '장기 복합불황독감'이 현해탄을 넘어와 한국 경제에 '불황 바이러스'를 퍼뜨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경제는 정보통신부문(IT)의 폭발적 생산성에 힘입어 지난 10년간 낮은 인플레 속에 고성장가도의 장기호황을 질주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이후 과잉재고와 IT부문의 과잉생산능력으로 주가폭락, 소비심리 위축, 성장률 저하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경제(저인플레속 고성장)의 전도사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금리인하 카드로 비틀거리는 신경제를 다시 세우려 하고 있지만 월가는 긍정적인 화답을 하지 않고 있다.

국내 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경기침체로 비상국면을 맞고 있다. 정부는 세계 경제의 난기류에 대응, 성장율을 당초 6~7%대에서 4% 이하로 대폭 내리고 무역흑자 규모도 하향조정하는 등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세웠다. 정부는 콜금리 추가인하, 추경예산 편성 등도 검토하고 있다.

이는 경기부양을 위한 정지작업으로도 풀이된다. 하지만 정책당국자들은 이런 때일수록 반환점도 돌지 못한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매진해야 할 것이다.

한국 경제를 날려버릴 수 있는 엄청난 화력의 '뇌관'(대우차 매각, 현대건설ㆍ현대투신 등 현대 부실계열사 처리)을 조속히 제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숨 돌린 증시, 해빙까지는 시간 걸릴 듯

증시는 지난주 말 미국 다우와 나스닥이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급락 분위기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주초에 증시가 다소 회복되는 것은 이 같은 분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 경기가 여전히 불투명하고 반도체가격의 약세도 지속되고 있어 냉각된 투자 분위기가 녹는 데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3월 초부터 본격화한 주총시즌이 종착역을 향해가고 있다. 이번 주의 가장 큰 관심사는 현대건설 주총. 경영진의 퇴진여부와 잠재부실을 어떻게 반영할지가 주목된다.

지난 3월26일 단행된 개각에서 건교부, 산자부, 정통부, 해양수산부, 과학기술부장관 등 일부 경제팀이 교체됐다.

일부 경제팀의 교체는 경제살리기를 위한 분위기 쇄신보다는 자민련과의 정책공조 복원을 '기념'하는 정치공학적 측면이 강해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경제팀의 잦은 교체는 정책의 일관성을 흔들리게 하고 시장의 신뢰감도 얻기 어렵다.

이의춘 경제부 차장

입력시간 2001/03/2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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