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정주영] 현대 대북사업 순항할까

'플러스 알파'노려 쉽게 포기는 안해

정주영 전 회장은 1989년 1월23일 한국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합작개발 의향서를 교환했다. 1998년 6월6일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었고 그해 6월23일 북한과 금강산 개발ㆍ관광사업에 합의했다.

이어 11월18일 금강산 관광선 금강호를 첫 출항시켰다. 김정일 군사위원장과도 이례적인 친분을 쌓았다. 1998년 10월27일 역시 한국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김정일을 접견했고 2000년 6월29일에는 김정일이 머무는 원산초대소로 헬기를 타고 날아가 '막걸리 면담'을 했다.

그와 김정일의 만남은 모두 3차례.

왕회장은 대북사업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겼다. 그는 단순한 이윤계산 차원에서 대북사업을 추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첫 방북 때 통일에 대한 소회를 피력했다.

"우리의 지상과제는 남북통일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우리는 아시아의 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북사업은 뉴프런티어로서의 북한 잠재력을 선점하는 효과를 현대에 가져다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울러 IMF체제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현대에 가해진 외압을 '북한카드'로 완화한 측면도 적지 않다.

북한은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가 방북했을 때 북한의 매체는 "남조선 기업인 정주영이 고향을 방문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금강산 개발사업과 서해안공단 개발사업도 현대에 독점권을 안겨주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민족경제인 정주영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북, 사업파트너십 유지 가능성 높아

왕회장의 죽음이 현대의 대북사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직 속단하기는 어렵다.

해답은 두 가지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우선 북한이 왕회장과 현대를 단순히 도구적 차원에서 활용했는지, 아니면 이를 넘어서는 수준의 비중을 두었는지 여부다. 둘째는 '포스트 정주영'시대를 맞은 현대측의 대북사업 추진 의지다.

북한이 사업 파트너로서 현대를 일단 유지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인적 유대와 의리를 중시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도 그렇지만 당장 현대를 대체할 뚜렷한 파트너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몽헌 회장 역시 부친과 함께 김정일을 3차례 면담한 적이 있다.

남북경협에서 현대가 차지해온 상징성도 북한이 쉽게 관계청산으로 가기 어려움을 시사한다. 정작 문제는 현대측에 있다. '고향사업' 차원에서 대북사업을 추진했던 왕회장과 달리 정몽헌 회장은 보다 실리 위주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사업의 적자로 자본금을 거의 까먹은데다 정몽헌 회장의 계열사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대북사업이 단기적 이익을 창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 회장이 직접 북한을 방문해 매월 1,200만 달러씩 북송하던 금강산 관광사업의 대가를 절반으로 깎아달라며 배수진을 친 것도 고려할 대목이다.

정부는 왕회장의 죽음이 대북사업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3월22일 "정부가 협력할 것이 있다면 가능한 테두리 안에서 협력해나갈 것"이라며 현대가 금강산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당국자들도 현대 대북사업이 2세에게 이미 승계됐다며 계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의 대북사업이 단순한 경제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는 시각은 없다. 북한의 경제적 이익과 한국의 햇볕정책을 방패막이로 삼아 현대가 부가적 이익을 얻어낼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28 14:44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