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 경영으로 중심이동

'킹''회장님'이어 디지털시대 이끌 뉴 리더로 등장

재계의 메인 스트림이 바뀌고 있다. 개발시대의 영웅들이 퇴장하고 풍요를 먹고자란 신진들이 입장하고 있다.

정주영씨의 타계는 한 시대가 가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동시에 삼성그룹 이재용씨의 등장은 새로운 구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이 들고난 '2001년 3월'은 한국 재벌사에서 그냥 지나치기 힘든 달이 될 듯하다.

이건희 삼성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의 경영참여로 이제 재계에는 명실상부한 재벌 3세 시대가 열렸다.

SK는 이미 3세 (엄밀한 의미에서는 2.5세지만 생물학적 연령으로나 기타 상황으로 볼 때 3세라고 규정해도 될 것 같다)로의 경영권 확립이 이뤄졌고, 현대에서는 3세의 경영수업이 시작됐다.

LG는 '자'(滋)자 항렬의 2세와 '본'(本)자 항렬의 3세가 뒤섞여있지만 사실상 3세로의 중심이동이 나타나고 있다.

여타 주요 그룹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재벌 2세들은 4대 그룹을 비롯, 대다수 그룹에서 경영실패를 겪었고 이로 인해 IMF 위기가 초래된 한 원인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재벌 1세들은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었고, 2세들은 IMF위기를 전후한 징검다리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3세들은 디지털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이 이제 시험대에 속속 오르고 있다.


재벌 3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재벌 3세대는 1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2세대와는 일부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다. 3세대는 2세대와 마찬가지로 '부자 아빠'를 뒀고 해외에서 공부했으며 기존 관행에 익숙해 있다.

하지만 2세대와는 달리 리버럴하고 국제환경에 더 민감하며 디지털 시대를 호흡하며 살고 있다. 성장과정도 2세대와는 달리 성장가도의 한국이 아니라, 격변의 와중이었고 사회의 여러 가치관이 바뀌는 시기였다. 그들중 상당수는 이른바 '386세대'에 속한다. 객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또 3세대는 2세대의 결속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집단적 유대감을 보이고 있다.

합작 및 공동투자 등 3세 집단의 독특한 행태는 인터넷 사업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유년기 및 청소년기에 그들만의 서클에서 교류할 수 있었고, 학연 등으로 얽힐 여지가 많았다는 점에서 일부 기인한다.

하지만 이들은 2세대보다는 더 '귀족'이라는 자의식과 '그들만의 리그'라는 폐쇄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조직한 이너써클이 한두 개가 아니고 거기서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재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격세(隔世)유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1세대의 모험적 성공담으로 인한 부담 때문에 2세대는 '성공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무리수를 많이 뒀고 이로 인해 엄청난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3세대는 아마도 1세대의 기업가적 기질을 계승하고 2세대의 한계를 극복하며 1세대적 특징을 보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황제로 군림할까?

재벌 1세대는 문자 그대로 '킹'(king)이었다. 2세대는 '회장님'(president)이다.

그럼 3세대는 어떤 파워맨이 될 것인가.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세계적 추세와 재벌개혁이라는 국내 여건속에서 이들은 황제경영을 유지할 것인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럴려고 할 것인가.

1세대가 황제경영의 전횡 속에서 모험가적으로 성공을 이뤘는데 비해 2세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황제처럼 행동하다가 망하거나 망할 위험에 처했었다. 3세대가 2세대의 실패를 교훈삼아 합리적 리더십을 발휘할 지는 아직 속단키 어렵다.

다만 그들이 주로 미국에서 선진적인 조직운영 스타일을 견문했고 비교적 개방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리더십의 잠재력은 전세대보다 낫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재계에서는 3세대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향한 '중간적 리더십'을 자신들의 지휘방침으로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법적, 제도적으로도 선단경영식 황제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고, 여론은 그보다 더 강한 재벌개혁을 원하고 있다.

게다가 경쟁격화라는 국제 비즈니스계의 엄혹한 현실은 독단적인 황제보다 합리적인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이 같은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지 않을 때 매출손실 정도가 아니라 그룹의 몰락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IMF 체제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교육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재벌 1세대는 그들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사업을 했고, 성공을 이뤘다"며 "새로운 세대는 그들로부터 기업가 정신을 배울 수 있겠지만 새로운 경영패턴을 수립하지 않고서는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 3세대의 면면

'고려대를 나오고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이사급으로 기획분야에서 경영수업 시작'. 최근 약진하고 있는 주요 그룹 3세들의 일반적인 경력이다.

SK㈜의 최태원(물리학과) 회장, 현대자동차의 정의선(경영학과) 상무, 제일제당 이재현(법학과) 부회장 등 재벌 3세중에는 유달리 고려대를 나온 이가 많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간 코오롱 이웅렬(경영학과) 회장도 고대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출신은 삼성의 이재용 상무보와 SK글로벌 최창원 부사장 정도가 고작이다. 연세대 출신으로는 한솔그룹 조동만 부회장이 있다.

대다수 재벌 3세들은 대학졸업 뒤 미국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미국식 경영학 석사인 MBA를 딴 3세만 해도 이재용(일본 게이오대), 정의선(미국 샌프란시스코대), SK텔레콤 최재원(하버드대) 부사장, 조동만(노스웨스턴대) 부회장 등 적지 않다. 최태원 회장은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고학력 재벌 3세다.

경영수업은 대부분 주요 계열사의 경영기획 파트 임원급에서 시작했다. 이재용씨가 최근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가 됐고 최태원 회장은 ㈜선경 미주경영 기획실에서 신규사업 발굴 업무로부터 출발했다.

다만 정의선씨는 특이하게 구매담당 이사로 현대차에 첫발을 내딛었는데, 이는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이 고(故)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은 코스 그대로다.

정의선씨는 또 일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사원으로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남다른 이력도 갖고 있다. 이재현 부회장이 씨티은행에서 근무하다 제일제당으로 옮기면서 경리과 대리로 출발한 것도 이채롭다.

이들 주요그룹 재벌 3세의 현직은 이사에서 회장까지 천차만별이고 지분율 등 오너십에도 공통점이 거의 없다. 이재용씨는 이건희 회장이 활동하고 있으나 사실상 그룹 지배권을 확보하고 있고, 최태원씨는 선친이 작고한 뒤 회사를 넘겨받았다. 정의선씨 등 현대가의 3세들은 약간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윤순환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28 14:48


윤순환 경제부 goodm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