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신문의 날 유감

21세기 들어 첫 신문의 날을 맞아 신문협회는 올해의 표어로 `꿈이 있다. 미래가 있다. 신문이 있다' 등 2편을 선정 발표했다.

신문협회는 그러나 신문고시(신문업에서 불공정거래행위 유형 및 기준)를 둘러싼 분쟁에서는 회원들간에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메이저 신문들은 자율적인 판매시장 고수를, 언론 개혁을 지지하는 신문들은 규제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신문끼리의 전쟁이 부수 확장 방법에서 신문 발행의 행태를 둘러싼 언론 사주의 철학과 비리 캐내기에 까지 확대되는 느낌이다. 새 세기 신문의 날은 이런 어수선함속에 지나가고 있다.

이럴 땐 하버드 대학에서 성적 부족으로 쫓겨난 천만장자 광산주이며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었던 조지 허스트의 외아들 란돌프(1863-1951)의 '신문인 일생 64년'를 생각하게 된다. 오슬 웬슨이 주연한 '시민 케인'은 그를 암울하게 영상화 했다.

그러나 뉴욕시립대학원 역사학 교수인 데이비드 나쇼가 작년에 낸 '더 치프(The Chief)'는 '신문인 허스트'와 '인간 허스트'를 침착하고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허스트는 그의 아버지가 정치적 목적으로 사들인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의 사주겸 발행인이 된다. 1887년의 일이다. 쫓겨난 하버드 대학에서 '램플'이란 해학 동인지의 영업을 담당한 것이 신문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이였다.

'이그재미너'는 공화당계열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훨씬 못 미치는 신문이었다.(발행부수:1만 5,000부 대 7만5,000부)

그러나 그는 대학 시절부터 뉴욕에서 발행되는 조셉 퓰리쳐의 '뉴욕 월드'에 독자였다. 그때 그는 '이그재미너'의 발행인이었던 아버지에게 '월드'의 세계에 대한 관심, 밀어닥치는 이민자에 대한 보도 등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뉴욕은 미국과 세계를 향한 신문의 메카라고 그는 느꼈다.

허스트는 1895년 뉴욕으로 와 그때 이미 발행부수 100만부에 육박하는 '월드'를 대적할 '뉴욕저널'을 사들였다. 1년후에는 아서 오크스가 '뉴욕 타임스'의 새 사주 겸 발행인이 됐다. '월드'와의 부수 싸움이 시작됐다.

허스트는 "뉴스는 만드는 것이다"는 주장아래 신문을 만들었다. 미국이 스페인과 쿠바문제로 전쟁을 시작할 때 그는 퓰리쳐와 함께 전쟁을 만드는 신문인이 됐다. 직접 자신의 요트를 군함으로 개조하고 특파원과 함께 종군 취재해, 표류하는 스페인 해군 20명을 구조하기도 했다.

"우리는 뉴스만을 보도한다"는 뉴욕타임스도 그의 활동을 신문인으로서의 부수확장 운동이라고 칭찬했다.

"실제로 그는 그의 손으로 20명의 스페인 해군을 잡았다. 이는 가장 합법적이고 정직한 신문 부수 확장이다. 상대지의 막강함을 두려워 않고 이룬 이런 업적은 자랑할만한 것이다"고 뉴욕타임스는 1898년 7월 7일자 사설에 썼다.

그는 이런 여세를 모아 언론사주이면서도 뉴욕에서 두차례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두차례 시장에 출마했으며, 민주당 대통령후보 2위 득표의 정치인이 됐다. 그는 부자이면서 재벌 해체주의자였고, 친 사회주의자였으며 노동자편이었다. 또 공공교육 확대를 주창했고, 외교적으로는 고립주의자였다.

미국이 내세우는 20세기 가장 탁월한 언론인인 윌러 리프먼은 1931년 '월드'지가 대공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통합될 때 허스트로부터 '저널'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는 두 신문을 모두 '옐로우 페이퍼'로 봤다.

리프먼은 '월드'의 몰락을 보고 신문계에는 "좋은 신문이 나쁜 신문을 구축한다"는 역 그레샴 법칙이 통용된다고 했다.

그는 "신문들은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재벌의 지원을 받고 대중지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독자들은 점차 선정주의에 지쳐 신문이 보다 선명하고 믿을 만하며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를 바란다.

신문이 옛날을 고수하면 실패한다. 성공하기 위해 '신문은 나폴레옹처럼 최고의 자리에 오려르고 하지도 말고 '보헤미안'처럼 바닥을 기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7년에 이르자 허스트가 갚아야 할 빚이 3,700만 달러에 이르렀다.제지사에 진 빚도 7,800만 달러나 됐다. 그는 허스트 신탁회사를 만들고 그의 모든 부동산과 수집한 예술품을 이 회사에 출자했다.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가 가진 신문의 편집.

조석간의 '저널'도 조간으로 통합되고 19개의 신문도 12개로 줄었다. 고립주의자인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재선된 루스벨트는 그의 측근에게 충고를 보냈다.

"쓰잘데 없는 신문은 없애도록 해야 하네. 피처스토리보다 뉴스를 더 많이 실어야 해. 피처는 좋은 것만 실고. 제발 1면에 매일 사설을 싣지 말아야 할걸세."

허스트는 "신문은 독자의 것이며 신문사 종사원의 것"이라면서 수십억 달러의 재산은 포기하더라도 '이그재미너' 등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의 왕국은 손자인 허스트 주니어에 의해 아직도 최대 언론재벌로 존재하고 있다.

박용배 언론인·세종대 겸임교수

입력시간 2001/04/0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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