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 생존전략] 벤처, 머니게임에서 생존게임으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21세기를 여는 봄은 왔건만 테헤란밸리에는 아직 동장군이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국내 벤처 기업들의 불황이 미국 일본 등 경제대국의 경기 침체와 현대건설 사태 등 불안한 국내외 경제 상황과 맞물려 장기화하고 있다. 많은 벤처 기업들은 채 꽃망울을 피우기도 전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일단은 살아 남는 것'이 그들의 당면 목표가 된 것이다.

인터넷 게임업체인 A사는 불과 1년전만 해도 잘 나가는 인터넷 벤처 기업의 하나였다. 지난해초 80억원의 투자를 받았으며, 8월에는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아셈타워에 380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확장, 이전했다.

그러나 지난해말 닷컴업계에 불황이 찾아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불안한 투자자들은 투자 회수를 요구했고, 신개발 사업은 자꾸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이 회사는 주주들의 요구로 지난해말 직원 40명중 90%인 36명을 감원했으나 올해 초에 컨텐츠 유료화에 실패하면서 자본 잠식상태에 들어가자 아예 사무실 문을 닫았다. 불과 1년여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것이다.


벤처 성장, 한계점에 다다랐다?

요즘 국내 벤처 업계는 '강자만이 살아 남는 정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년 전만 해도 몰려드는 투자자를 거절하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던 벤처 CEO(최고경영자)들은 이제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한 힘겨운 생존 경쟁을 벌여가고 있다.

이런 경쟁에서 도태된 많은 중소 벤처 기업들은 이미 사라졌고, 앞으로 그 숫자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중기청에 등록상으로 나타나 있는 벤처기업의 수는 줄지 않았지만 이중 적지않은 기업들이 실질적인 폐업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보면 된다.

벤처 불황의 가장 큰 원인은 그간 낙관론에 빠져 있던 벤처 비즈니스에 대한 거품이 걷히면서 불거진 '벤처 성장의 한계론'의 대두다. 사상 유례없는 미국 경제 10년 호황을 이끌었던 벤처 비즈니스에 대한 전망이 회의적으로 바뀌면서 기대감에 의존해온 벤처 투자자들의 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실제로 그간 '묻지마'투자자들의 눈먼 자금을 받아 사업 영역 확장에 주력했던 벤처기업들이 차츰 수익 창출의 한계점에 부딪치면서 잠복해 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호황 때 같으면 '추가 투자를 받으면 되지'했지만 이제는 확실한 수익 모델과 영업 이익이 나지 않는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더구나 장밋빛 미래만 생각한 벤처들이 방만한 경영으로 투자 자본을 거의 소실해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액면가의 수십배, 수백배까지 프리미엄을 받았던 소위 간판 인터넷 닷컴 기업들도 이제는 몇 억원을 펀딩받기조차 힘들다. 그러다 보니 중소 인터넷 기업들은 아예 '투자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 벤처 캐피털 회사의 책임 연구원은 "지난해 창투사들이 벤처기업에 투자한 총액은 겉으로는 1999년에 비해 줄지 않았지만 그것은 삼성이나 SK 같은 대기업들이 자사 관련 벤처기업에 투자한 것을 합쳐서 나온 허수에 불과하다"며 "실제로 지난해 6월 이후 중소 인터넷 벤처기업에 투자한 창투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미미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벤처 업계의 시름이 깊어지면서 각 벤처기업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월급대신 주식 받기도

귀금속을 제조하는 G모 벤처회사는 최근 임원 이하 전 사원이 기존 업무 외에 회사에서 구슬꿰기 일을 한다. 지난해까지는 하청업체로부터 완제품을 납품받았으나 경비를 줄이기 위해 직원들이 손수 구슬을 꿰기는 것이다. 이 작업으로 이 회사는 약 20~30%의 비용을 절감한다.

전문가들을 소개해주는 헤드헌터 벤처기업인 엑스퍼트(www.xpert.co.kr)직원들은 모두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출근한다. 회사 경비를 줄이자는 한 간부 사원의 제의로 시작됐는데, 지금은 직원간의 친목도 좋아지고 업무 효율도 높아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

또 일부 소규모 벤처회사에서는 직원 월급 대신 주식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해에는 벤처에 대한 이상 과열 현상으로 벤처 비즈니스가 일확천금의 대상으로만 생각된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의 불황이 비록 개별 기업 경영에는 곤란을 주지만 진정한 벤처 정신을 가진 회사만이 살아 남도록 하는 '옥석 가리기'의 계기가 될 수 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주)코스메틱랜드는 국내 최초의 인터넷 전문 쇼핑몰 업체이다.

인터넷 전자상거래에 대한 인식이 희미했던 1997년 국내 벤처 1세대인 최선호 사장이 문을 연 이 회사는 1998년말부터 IT(정보통신) 벤처 열풍이 몰아치면서 이 분야 선도업체로 각광을 받았다.

참신한 아이템과 선도업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1999년말 국내 창투사로부터 110억원의 투자를 유치해 여성 포털사업부와 여성 잡지 분야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하지만 지난해초부터 벤처 시장에 찬바람이 감지되자 이 회사는 발빠르게 내핍 경영에 들어갔다. 우선 월 최대 10억원에 달했던 광고를 중단하고 4개 사업부를 2개로 줄이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98명이던 직원 수도 절반인 50명으로 대폭 줄였다.

또 2개층을 사용하던 사무실도 한 층으로 통합하는 등의 규모 축소를 통해 총 비용을 40% 이상 줄이는데 성공했다. 두개 사업부에 역량을 집중한 덕에 매출은 오히려 늘었다.

이 회사 전략기획실의 오윤관(37) 실장은 "인터넷 선도업체인 만큼 위기에서도 발빠른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며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자생력이 약한 벤처기업일수록 뼈를 깎는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무실 축소, PR시장도 찬바람

지난해 신문 방송 잡지 등의 광고업계는 인터넷 기업들의 광고로 한 때 호황을 누렸다. 지하철과 버스, 택시 같은 대중 교통수단에도 굴뚝 산업은 사라지고 인터넷 기업 광고가 홍수를 이뤘다. 신문과 잡지사들은 인터넷 광고 전담 팀을 구성해 유치에 나설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닷컴 기업들의 광고는 지난해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그만큼 이 분야의 경기가 나빠졌다는 반증이다.

기업 홍보전문 대행사인 벤처피알의 곽지현 팀장은 "지난해 중소 벤처 회사들이 무더기로 생기면서 덩달아 PR 시장도 큰 호황을 누렸다"며 "지난해에는 돈을 들고 와 자사 홍보를 맡기곤 했는데 지금은 각 회사들이 광고비를 줄이거나 내부에서 처리하는 바람에 PR 대행을 맡기려는 회사가 거의 없다"고 털어 놓았다.

불황의 여파는 중소 벤처 뿐아니라 소위 잘 나간다는 유명 벤처회사들도 어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글과 컴퓨터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전문 닷컴기업인 네띠앙은 올해부터는 회사가 부담하던 개인전화 비용을 개인 부담으로 돌렸다.

그리고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해외 연수 프로그램도 중단했다. 또 비용만 드는 네티즌 서비스 일변도에서 탈피해 당장 수입이 나는 인터넷 솔루션 임대 같은 웹 호스팅 사업쪽으로 사업 방향을 수정 했다.

네티앙의 한 관계자는 "자존심을 살리려다 속이 골병 드느니, 요즘 같은 불황에는 내실을 갖는 편이 더욱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국내 인터넷 벤처기업의 간판기업 중의 하나인 새롬기술도 최근 인터넷 전화서비스인 다이얼패드와 자회사 새롬소프트가 운영하던 포털서비스 새롬넷을 통합, 회원수 370만명을 보유한 포털업체로 변신했다. 별개 사이트로 운영하는 것보다 영업비나 광고비를 절약할 수 있고 페이지뷰도 늘릴 수 있다는 생각에 전격 통합을 단행한 것이다.


내실 다져논 업체는 오히려 공격 경영

불황기라고 해서 모든 벤처 기업들이 움츠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호황기에 넉넉한 자금을 확보했거나 확실한 전문 기술이나 수입 기반을 가진 벤처 기업들은 오히려 불황을 기회로 삼아 공격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경쟁사들이 주춤하고 있을 때 오히려 차별적인 경영으로 그 분야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자는 전략이다.

국내 최초로 홍채 인식 원천기술을 개발한 알파엔지니어링은 2월부터 직원 개개인을 특정 분야 사내 전문가로 육성한다는 계획으로 인재 양성에 나섰다. 본인이 원할 경우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해외 연수를 보내주고 연구 활동에 필요한 비용도 제공한다.

안테나와 중계기를 생산하는 에이스테크놀로지는 최근 신문에 대대적인 직원 채용 광고를 냈다. 이 회사는 글로벌 기술 중심 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해선 인재 확보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는 지난해말 중국 광둥성 가오야오시에 연간 8만4,000개의 핵심 부품 제조공장을 증설한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는 상하이에도 생산기지를 세울 계획이다.

또 IMT-2000과 디지털방송 개시에 맞춰 광통신 장비 부품 분야에도 진출키 위해 기존 연구소와는 별도의 생산기술연구소를 발족시키기로 했다.

닷컴 기업들에게 최근의 불황 탈출구는 콘텐츠 유료화다. 네오위즈가 운영하는 채팅사이트 세이클럽(www.sayclub.com)은 지난해 11월부터 일부 특화된 서비스에 유료화를 실시해 지난달까지 20억원의 누적 매출액을 올리는 개가를 거두었다.

또 네이버가 운영하는 게임사이트인 한게임(hangame.naver.com)은 컨텐츠 유료화 개시 20일만에 6억8,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만화 성인 콘텐츠 제공업체인 노머니커뮤니케이션은 한스테이닷컴(www.hanstay.com) 등도 유료화 이후에도 가입자들이 계속 늘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국내 포털 선두업체인 다음의 경우 기업 메일에 대해 유료화 방침 발표 이후 이용자들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닷컴 열기는 많이 가라 앉았지만 아직도 하루에 상당수의 닷컴기업이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IMF의 암울한 터널에서 유일한 탈출구 였던 벤처 비즈니스. 비록 한 때의 과열 열기가 있었지만 벤처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역동성과 가능성을 담고 있는 희망 임에 분명하다. 현재의 불황이 '머니 게임'이 아닌, 성장 벤처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4/04 18:47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