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52)] 가라스(烏)

일본의 공원에서 비둘기와 함께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새가 '가라스'(烏), 즉 까마귀이다. 잔디밭에 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열면 어느새 날아와 나무 위에서 예리한 눈빛을 빛내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 잽싸게 음식물을 채서 달아난다.

사람을 크게 무서워하지 않아 수m 앞에까지 다가 오고 사람들도 크게 미워하는 눈치가 아니다. 까마귀의 칙칙한 이미지에 길든 우리 눈에는 낯설기 짝이 없다.

가까운 거리에서 자세히 살펴 보니 이만저만 늠름한 모습이 아니다. 검게만 여겼던, 기름이 자르르한 깃털은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온갖 색깔로 빛난다. 커다란 덩치에 큼직한 부리를 갖추고 있어 웬만한 새는 보기만 해도 겁을 먹을 만하다.

일본의 도회지에서 크게 늘어나고 있는 이 까마귀는 대부분 큰부리 까마귀로 몸길이가 최대 60cm에 이른다.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은 몸집의 까마귀는 일본에서도 서식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급격히 줄어든 반면 큰부리까마귀는 도시화와 환경 파괴가 결과적으로 종의 번성을 불렀다.

도쿄의 경우 다마(多摩) 등 서쪽 구릉지의 숲속에서 살았으나 잇따른 택지개발로 서식지를 잃고 메구로(目黑)의 국립자연교육원 등 숲이 무성한 도심의 공원으로 이동했다.

대량으로 배출되는 음식쓰레기까지 확보했으니 개체수가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먹이를 얻기 위해 긴자(銀座)나 신주쿠(新宿) 등의 번화가로 일제히 날아가는 모습은 장관이다.

까마귀가 크게 늘면서 활발해진 생태 연구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졌다.

큰부리까마귀는 육식성이 강해 쓰레기 봉지에서 주로 고기나 생선 등을 먹이로 택한다. 먹이가 넉넉하지 않을 때는 쓰레기장을 함께 뒤지던 비둘기나 괭이갈매기를 공격하기도 한다.

먹이가 풍부할 때는 감추어 두었다가 배가 고플 때 찾아와 꺼내 먹기도 한다. 별미로 즐기는 호두를 도로의 자동차 바퀴자국 위에 올려 놓았다가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에 짓이겨지면 챙겨 먹는 모습은 찬탄을 자아낸다. 개보다는 훨씬 영리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봄철 번식기에는 암수 한쌍이 무리를 떠나 나뭇가지로 집을 짓고 사방 1km 정도인 영역내에 다른 까마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나뭇가지를 찾기 어려우면 빨랫줄에 걸린 철사 옷걸이를 훔쳐다가 대용품으로 쓴다. 옷걸이를 교묘하게 휘고 꺾어 그럴듯하게 지은 집을 보면 도회지 생활 적응이 사람보다도 빠른 듯하다.

새끼가 부화하면 강한 보호 본능을 발동해 집이 있는 나무 밑을 지나는 행인을 부리로 공격한다. 등이나 머리를 부리에 찍혀 옷이 찢어지거나 상처를 입는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급기야 도쿄를 비롯한 전국 자치단체가 2000년부터 대대적인 까마귀 체포 작전에 나섰다.

도쿄의 경우 2만마리가 넘는 까마귀를 1985년 수준인 7,000마리 정도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총으로 쏘는 데 대한 시민들의 반발이 커 집을 부수어 번식을 막거나 덫을 이용해 생포하는 방법에 의존하다 보니 큰 효과가 없다.

까마귀 사살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은 까마귀를 신령한 존재로 여겨 온 전통이 배경이다.

'니혼쇼키'(日本書紀?20년)와 '고지키'(古事記?12년)에는 '야타가라스'(八咫烏)라는 까마귀가 신의 사자로 등장한다. 태양에 사는 불의 요정인 세발 까마귀, 삼족오(三足烏)에 대한 신화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전래된 결과이다.

새를 신의 사자로 섬기는 것은 천신숭배 신앙의 공통 현상이지만 음(陰)의 수인 짝수를 피해 양(陽)의 수인 홀수로써 까마귀의 다리를 나타낸 것은 음양오행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일본에서 세발 까마귀 숭배의 전통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세발 까마귀를 섬기는 신사가 전국에 분포해 있는 것은 물론 일본축구협회의 심볼마크도 세발 까마귀가 축구공을 잡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농작물 피해 때문에 까마귀를 미워하는 농가에서도 첫 쟁기질 등의 중요한 날에는 까마귀에게 떡을 던져줘 그것을 먹는지 여부로 수확의 풍흉을 점친다. 또 논의 3곳에 먹이를 놓고 까마귀가 어느 먹이에 매달리느냐에 따라 조려芟만생종 볍씨의 파종을 결정하는 풍습도 있다.

도회지에 서식지를 만들면서 미움을 받기 시작했지만 오랜 세월 거리낌의 대상으로 여겨져 오고 최근에는 정력제라고 남획된 우리 까마귀에 비하면 아직 행복한 처지이다.

황영식 도쿄 특파원

입력시간 2001/04/0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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