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53)] 미마나(任那)

2002년부터 사용될 일본의 중학교용 역사교과서가 한중 양국의 커다란 반발을 부르고 있다.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가 전체적으로 근ㆍ현대사의 가해 기술을 축소하고 '침략'을 '진출'로 바꾸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이 1982년 당시로 되돌아간 듯하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보다 더욱 비난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찬한 후소샤(扶桑社) 교과서가 한중 양국의 불합격 요구에도 불구하고 검정을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교과서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 주장을 희석하고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가해 사실을 추가하는 등 137곳을 고쳤지만 우려대로 편찬자의 의도를 어떤 형태로든 남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고대사 부분에 남은 '미마나(任那) 일본부설'이 대표적인 예의 하나다.

'야마토(大和) 조정은 4세기 후반 바다를 건너 조선에 출병, 반도 남부의 미마나(任那=加羅)라는 곳에 세력권을 차지했고 후대의 일본 역사서는 그 거점을 미마나일본부로 불렀다'는 기술은 검정 결과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미마나(加羅)라는 곳에 거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로 축소ㆍ수정됐다.

그래도 비슷한 내용을 담은 다른 7종의 교과서가 '미마나' 라는 표현을 피한 것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어떻게든 임나일본부설을 환기하기 위한 기술이다.

'미마나'는 임나(任那)의 일본식 음독으로 '니혼쇼키'(日本書紀ㆍ720년)의 '미마나'(彌摩那)와 같은 표기로 여겨지고 있다. 현대 일본어의 음독인 '닌나', 또는 읍락국의 수장을 뜻했던 우리말의 '니나마'(主邑)가 음운 변화를 거친 결과로 여겨지고 있다.

임나라는 지명은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를 비롯한 한중 양국의 문헌과 금석문에도 언급돼 있다.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크게 보아 가야의 별칭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기에 '일본부'가 붙어 임나일본부가 되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부'(府)는 중국 한나라때 장군들이 천자로부터 위임받은 군사ㆍ행정권의 행사를 위해 설치한 군사통치기구에서 시작됐다.

일본 보수학계는 니혼쇼키의 임나일본부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가야에 일본의 군사통치기구가 실재했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주장은 오랫동안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됐으며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니혼쇼키의 관련 기술이 한정된 6세기 당시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호가 쓰이지 않았다는 등의 수많은 모순은 일본내에서도 일찌감치 지적돼왔다.

그러니 남북한 학계의 반발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니혼쇼키 관련 기사의 주어를 일본 대신 백제로 읽어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가야에 설치한 군사기구로 보려는 시도는 물론 임나를 쓰시마(對馬)나 규슈(九州)에 비정하려는 노력까지 전개됐다.

이런 노력이 임나일본부에 대한 해묵은 식민사관을 시정하는 데 기여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그렇지만 삼국사기가 7세기 중엽의 신라인 강수(强首)를 임나가라(任那加良) 출신으로 적었고 창원 봉림사의 진경대사탑비가 진경대사를 임나왕족의 후예라고 적은 것과 모순된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된다.

최근 한일 양국의 소장파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의 일본식 훈독의 하나인 '야마토노미코토모치'를 주목하고 있다.

'야마토노'는 '야마토(大和)의', 즉 '일본의'라는 뜻이며 '미코토모치'는 '오기미'(大君ㆍ大王)의 뜻을 지방의 수장에게 전하기 위해 파견됐던 사신을 가리켰다. 이렇게 보면 임나일본부는 통치기구가 아니라 일본이 임나, 즉 가야에 파견했던 사신을 가리키게 된다.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와나미쇼텡(岩波書店)의 '고지엔'(廣辭苑)도 '야마토 조정이 가야 제국에 파견했던 사절단'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감정적 반발에서 니혼쇼키를 엉터리 역사서로 몰아치기는 쉽다. 다만 그럴 경우 니혼쇼키에 담긴 가야와 일본의 풍부한 교류의 역사까지도 함께 버려야 한다. 조금만 냉정한 눈으로 보면 일찍이 일본 열도에 진출한 가야가 신라와 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맞아 일본 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생생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가야와 일본의 관계를 어떤 시각에서 보든 불가분의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만드는 모임'에 참여한 넌픽션작가 이자와 모토히코(井澤元彦)조차도 임나와 야마토 정권의 관계를 노르만 정복(1066년) 이후의 노르만디와 영국 왕실의 관계로 비유한다

노르만족과 프랑스의 이질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더라도 임나일본부설의 정면 부인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4/1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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