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종로구 궁정동(宮井洞)

조선조 영조의 생모가 궁중내의 하인격인 무수리 신분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의 시대상이 모이기만 하면 가문 자랑에 출신성분 자랑을 일삼던 시절이라 영조의 한맺힘과 죽은 생모 최무수리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마침내 영조는 호조판서에 명하여 생모 최씨 신위(神位)를 모실 육상궁(毓祥宮)을 짓게 하고 건물의 기둥과 문, 모양 등을 종묘(宗廟)와 조금도 다름없이 짓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영조로서는 자기 출신 성분에 늘 열등의식이 있었던 것이 발로된 꼴이었다.

그러나 명을 받은 고지식한 신하는 왕이 생모의 사당을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종묘와 똑같이 지을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무척 당혹해했다. 고심 끝에 집터를 평지보다 더 깍아내어 낮게 하고 건축물을 종묘의 치수대로 지었다.

영조가 준공때 거동해보니 집이 낮고 종묘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므로 크게 노하여 목소리를 떨며 "네가 감히 짐의 뜻을 어기느냐"며 호통을 쳤다.

신하가 "한치도 어긋남이 없을 것이오니 자로 재어보소서"라고 아뢰었다. 재어보니, 과연 치수가 종묘와 견주어 다를 바가 없으므로 마음은 아팠으나 더이상 내색을 하지 못했다.

대신 영조는 친히 생모 최씨의 신주를 종묘에다 모시려고 행차했다.

'설마 누가 감히 짐의 앞을 가로막으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일직 승지가 차마 왕을 무엄하게 몸으로는 막을 수 없는지라 땅에 엎드려 왕의 신발 뒷꿈치를 입으로 물며 만류했다.

"아무리 전하의 생모지만 정실 왕비가 아닌 후궁의 숙빈(叔嬪)을 종묘에 여느 왕의 정비 신위와 함께 모신 예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네 이놈! 무엄하다. 너는 에미도 없느냐"고 호통쳤으나 "전하께선 한 나라의 제왕으로서 사사로이 생모의 정을 못잊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체통을 돌보시지 않으시렵니까"라고 일직 승지는 간곡히 만류했다.

이에 그만 영조는 "오냐, 내가 졌다"고 신주를 안고 돌아서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중신들은 다같이 "전하! 전하!" 하며 땅을 치며 통곡했다 한다.

지금 궁정동(宮井洞)에 자리한 육상궁은 이렇게 해서 지어졌으니 '육상궁'(毓祥宮)이란 '기를 육(毓)'에 '복 상(祥)'의 뜻. 육상궁은 뒤에 왕의 정실이 아니면서 왕자를 낳아 궁호를 받은 다른 6개의 궁묘(延祐宮, 儲慶宮, 大嬪宮, 宣嬉宮, 德安宮, 慶祐宮)를 이곳에 합하여 '칠궁'(七宮)이라 한 것이 오늘의 이름이다.

궁정동은 '육상궁'과 그전의 '온정동'(溫井洞)의 끝 글자와 가운데 글자를 따 합성한 것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ㆍ26사건. 그 현장이 바로 궁정동에서 얼마 안떨어진 안가(安家)다.

우리 역사에서 10ㆍ26사건은 궁정동의 땅이름 사연과는 아무런 걸림이 없다.

오히려 영조의 생모에 대한 지극하고도 따뜻한 정이 옛날 따뜻한 샘이 있었던 온정동과 연관지어 봄직하고 또 영조의 생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온정동 부근에 육상궁을 지어 '궁정동'이라는 이름을 낳게 했으니 그것이 궁정동 시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역사의 현장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모아졌을 뿐이다.

안가(安家:宮)로 사용하던 궁정동 건물과 옛 칠궁을 연결해서 한번 상기해봤을 뿐이다. 세월은 가고 역사는 말이 없다.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화 이사

입력시간 2001/04/10 20:3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