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종로구 재동 백송(白松)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세력(기득권 세력)인 원로 대신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여러 조정 중신들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라고 역사는 쓰고 있다.

1452년 5월 문종이 보위에 오른지 2년만에 승하하자 단종이 13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오르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后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 대리정치)를 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다.

그러나 당시는 조선조 건국초기라 그 같은 제도화가 미흡했다.

게다가 대왕대비도 없었고 단종의 모후 권씨(權氏)는 세자빈으로 있을 때 단종을 낳은 뒤, 산후처리가 잘못되어 이틀만에 세상을 떠고 말았으니., 궁궐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 뒤 문종은 권씨를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증하고 후궁으로 귀인 홍씨, 양씨만을 두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惠嬪 楊氏)가 있기는 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때문에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인 황보인 김종서 등이 어린 단종을 보필하며 정치권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상왕이던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적자(嫡子) 문종을 비롯, 수양(首陽), 안평(安平), 임영(臨瀛), 광평(廣平), 금성(錦城), 평원(平原), 영용(永庸)등의 대군(大君)이 있었다. 세력있는 여러 대군의 존재는 약한 왕권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정치적 야심을 갖고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주위로 끌어모았다.

반면 안평대군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 예술을 좋아하며 동호인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또한,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한편, 수양대군이 왕권을 넘보며 거사를 생각한 것은 단종이 즉위하고 2개월이 지난 1452년 7월께다. 권람이 수양대군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정계 움직임에 대한 진심을 털어놓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실제로 대권에 야심을 품고 권람, 홍윤성,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끌어 들인다. 수양대군은 1453년 4월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부터 거사 계획을 본격화한다.그의 막하에 신숙주를 끌어들이고 홍달손, 양정(楊汀)등의 심복무사를 키운다.

같은해 10월 10일 밤, 마침 단종이 그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집인 영양위궁(寧陽慰宮)으로 출타하고 없는 틈을 타, 한명회(韓明澮)간언을 듣고는 유숙(柳淑), 양정, 이을운(李乙云) 등을 데리고 김종서가 있는 북촌으로 행한다.

한 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수양의 방문에 김종서는 무척 당황하긴 했지만 설마하는 사이에 수양과 그의 행동대원들은 김종서와 그 식솔들에게 숨돌일 겨를도 없이 일시에 철퇴를 가했다. 한 순간에 김종서의 집안은 붉은 피바다로 변했다.

붉은 피가 더운 김을 무럭무럭 내뿜으며 동네골목을 타고 뻑뻑히 흘러 내렸다. 피비린내가 아닌 밤중에 온 동네를 진동했다.

계유년(癸酉年) 10월 10일 밤의 일이였다. 이때 갑자기 온 동네 닭(酉)이 한꺼번에 목놓아 울어댔다. 역사는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쓰고 있다.

이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온동네 골목에 재를 뿌렸으니, 이때부터 동네이름을 '잿골'이라 불렀고, '잿골'을 한자로 옮기면 '회동(灰洞)'. 회동이던 잿골이던 그 끔직한 역사의 현장에 몸서리가 나, 뒷날 그냥 재동(齋洞)으로 고친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그 끔직한 역사의 현장을 수령 600여년의 재동 백송(白松:천연기념물 제8호)은 알고 있을 테지!

이흥환 현 한국땅이름학회이사

입력시간 2001/04/1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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