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서유석(下)

'70년대 포크의 기수'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런 표현들은 가수 서유석을 칭하는 미사여구들이다. 흔히 서유석을 김민기 한대수와 묶어 '포크 3인방'이라 부른다.

서유석의 노랫말은 또 곧잘 미국 '모던 포크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밥 딜런의 음악에 비유된다. 밥 딜런과 존 바에즈가 월남전 반대 등 반전 메시지를 품고 있다면, 서유석은 독재군사정권의 암울한 정치상황이 빚어낸 정치ㆍ사회 현실을 풍자하는 메시지로 무장했다.

대상이 다르긴 해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고민한 동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음악을 즐겨 부르고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닮은 꼴이다.

서유석의 3대 명반으로는 3집 1972년9월23일 출시>, 4집<서유석 걸작집-유니버샬KLS42. 1972년11월5일 출시> 그리고 5집<선녀-유니버샬 KLS57. 1973년 출시>을 꼽는다.

1973년 4월 TBC의 심야 라디오 프로인 '밤을 잊은 그대에게' DJ를 맡기 전까지 발표했던 71~73년의 3대 명반을 포함한 6장의 초기 음반은 그가 음악마니아들에게 '70년대 포크의 기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이유다.

3집은 국내 첫 라이센스 계약으로 최고의 음질을 자랑하는 성음사의 수출용 음반으로 나왔다.

타이틀과 모든 곡 제목이 영문으로 표기된 봉투형의 특이한 앨범이다. 총12곡의 수록곡중 대표곡은 양병집이 채보해 개사한 <타박네>와 구전가요 <진주낭군>. 한국적 가락의 향기가 진동하는 앨범이다.

4집은 앨범 자체가 금지된 불손한 서유석의 최대 명반. 이 판에 수록된 11곡은 어느 곡하나 빠뜨릴 수 없는 명곡들이다. 특히 <담배> <강> <먼후일> <친구야>는 섬뜩할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민기의 데뷔앨범처럼 지하에서 불티나게 불법 복사돼 소장하는 것 자체가 자랑이었던 음반이다.

5집은 한국 록의 '살아있는 전설' 신중현과의 성스런 작업의 결실이 낳은 음반이다.

'신중현과는 음악적 갈등으로 고통속에서 제작한 음반이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두 사람사이에서 '가장 큰 간극은 사랑에 대한 서로의 출발이 다름'에서 왔지만 결국 '종교적 사랑'으로 신중현과 음악적 합일점을 찾고 한국 최초의 포크록 음반을 창조해 냈다.

합일의 결과가 바로 <선녀>다. 마치 선녀가 내려오는 듯한 신비한 분위기의 사운드가 환상적인 명곡이다. 신중현이 직접 노래한, 마치 환각제에 중독된 듯한 상태에서 싸이키델릭하게 연주한 미발표곡 '엽전들'의 <선녀>를 듣노라면 전율을 느낄 정도다.

장현의 노래로 유명한 <나는 너를>의 오리지널 가수가 실은 서유석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 음반에서 노래한 서유석 버전 <나는 너를>은 장현을 능가한다.

'반사회적인 통기타쟁이'로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당국으로서는 그의 방송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 그 때는 국군의 월남파병논쟁으로 온 나라가 뜨거운 정치적 공방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던 시기였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프로에서 느닷없이 UPI 종군기자가 쓴 '추악한 미국인' 종군기가 여과 없이 마이크를 탔다. DJ 서유석이 사고를 친 것이다. 서유석은 이후 3년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된다.

실내장식업을 겸한 양복점 '타나타'로 첫 사업을 시작해 재미를 보지만 2년이 못 가 적자를 냈고, 대전에서 '아리'라는 호프집을 내 냉혹한 경제ㆍ사회 현실을 몸으로 익히기도 했다.

이따금 대학축제에 불려가 노래로 억눌린 울분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은 무력감과 좌절감이 뒤섞인 가위눌림으로 변했다. 이때의 처절한 심정을 담은 노래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6개월만에 100만장의 발매기록을 세운 8집 <가는세월-서라벌SLK1022>이다.

이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가는세월>을 서유석의 대표곡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젊은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그림자>로 연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집안에선 늘 말썽꾸러기, 사회에선 요주의 문제아로 취급당했던 서유석. 그러나 뚜렷한 자기 주관과 시대를 앞서가는 강한 개성은 60-70년대 보수적인 현실에선 그렇게 취급당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입국 비자문제, 그리고 미 대사 부인의 초청 거절건으로 반미인사로 낙인찍혔던 두차례의 자존심 싸움. 그래서 그는 지독한 애국자인지도 모른다. 사업차 방문한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교민들을 한마음으로 묶은 즉석 콘서트는 물론 늘 소외계층과 잘못된 사회현실을 꼬집는 것도 혹 애국심이 너무 강해서가 아닐까?

'노래에 메시지가 없다면 그건 노래가 아니다.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젓가락만 치고 부르는 작부가락으로 취입을 하는 가수도 나올 것이다.' 요즈음 크게 변화된 그의 음악관이다. '60세가 될 때 완성하고 싶다'던 폭넓은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에 대한 그의 꿈.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서유석. 그가 평생 꿈꿔온 장르를 초월한 지순한 '사랑'노래는 과연 어떤 가락과 노랫말일까? 그의 60세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최규성 가요컬럼니스트

입력시간 2001/04/18 18:26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