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검사 갈등] 상대방 공개비판, 판·검사들 감정싸움

근대 사법 제도에서 판결권(법원)과 수사권(검찰)이 분리된 것은 300년 정도에 불과하다. 18세기 이전에는 사법제도가 발달한 유럽에서조차 판관은 규무주의(In-quisitory System) 원칙에 따라 피의자에 대한 수사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판결에 이르기까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다.

판관의 이런 과도한 권한은 자연히 인권 침해의 부작용을 낳았고, 그 대안으로 수사와 판결을 분리하는 근대탄핵주의 소송 제도가 등장했다.

현재의 법원과 검찰 조직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지만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태생적 운명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한 모태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 격인 법원과 검찰이 최근 유례없는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지난해부터 법원과 검찰은 각종 정치인 연루 형사 사건에서 극단 적인 시각차를 보이는 것은 물론, 상대측 고유 영역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는 드으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특히 양측은 '판결문으로만 말한다'(법원), '공소권으로 말한다'(검찰)는 그간의 관행과 내부 규율을 뛰어 넘어 상대방을 공개 비난하는 식의 사상 유례없는 감정적인 대립으로 발전하는 양상이다.


법원, 검찰수사에 잇단 의무제기

사법 행정의 두 보루인 법원과 검찰의 벌어진 틈이 세인들에게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말 옷로비 판결 때부터다.

11월 9일 서울지법 319호 법정에서 열린 옷로비 1심 판결에서 재판장인 김대휘 부장판사는 이형자·영기 자매에게 옷로비 의혹사건 청문회 위증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김태정 전 검찰청장 부인 연정희씨와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부인 배정숙씨,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씨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는 '이형자의 자작극'이라는 검찰의 기존 결론을 전면 부인하고 급조된 특별검사(최병모 변호사) 팀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판결 배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법원은 검찰에서 기소한 범죄 사실에 대해서만 유·무죄를 판달할 뿐이다"라며 "검찰로서는 검찰총장 부인(연정희)의 진술을 믿고 싶지 않았겠는가. 검찰이 사건 초기 단계에서 전화 통화 내역 들을 조사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고 검찰의 미흡한 수사를 지적했다.

재판부가 검찰 '최고정예 수사팀'인 대검 중수부와 서울 지검 특수부에 먼저 흠집을 낸 것이다. 가뜩이나 김태정 전 총장 사건,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 사건 등으로 위상이 추락했던 검찰로서는 또 한차례 씻기 힘든 타격을 받은 것이다.

당시 대검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지검 공안부 박만 부장검사는 이에 대해 "재판부가 정씨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이씨 주장만 100% 믿은 결과다.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다. 즉각 항소하겠다"고 반박했다. 이때까지도 법원과 검찰의 공소 범위 내에서만 의견을 피력했고, 검찰도 상처는 컸지만 항소라는 법적 테두리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양측은 서로 화합하기 힘든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수면 아래 있던 법·검 갈등은 2월 한빛은행 대출 외압 의혹 사건 1심 재판을 계기로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2월 31일 열린 심리에서 재판부(서울지법 형사합의 21부 장해창 부장판사)는 "검찰의 수사 기록이나 피고인들의 법정진술만으로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도, 판걸문에 '박지원 전 장관이 박혜룡 아트월드(주) 사장의 부탁으로 한빛은행 간부들에게 불법대출과 관련한 청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검찰의 공소 내용에도 없는 박 전 장관의 연루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검찰에서 '단순 대출 사기극'으로 결론 내린 사건을 법원이 정권 실세가 개입한 '권력형 비리'일 가능성이 있음을 표명한 것이다.

더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추정된다', '강한 의심이 든다'등 판결문에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단어까지 넣어 가며 검찰 수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해 옷로비 사건에 이어 정치인 관련 행사 사건에 대해 법원이 보다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임창열지사 사건으로 갈등 폭발

자칫 '정치권의 시녀'로 전략할 위기에 처한 검찰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진 않았다. 검찰은 "판결이 판사의 영역이라면 수사는 검찰의 영역"이라며 불괘감을 감추지 않았다.

검찰 조직의 성격상 법원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일부 소장파 검사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법원쪽에 대한 반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재판부 판결이 있은 다음날 서울지검 공판부(심장수 부장검사)는 '형사 재판에서의 법원의 양형(형량을 정하는 것)이 지나치게 온정적이며, 법원이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공개했다.

지난해 상반기 서울지법 단독 및 항소부 선고 사건 931건을 분석한 이 보고서에서 검찰은 "법원이 집행 유예 선고의 결격 제한을 피하기 위해 구속기간(1심 6개월, 2심 4개월)을 넘겨가며재판 기간을 연장해 주는 등의 편법을 쓰고 있다'며 '지난해 상반기 931건(구속 877건, 불구속 54건) 중 재판진행 도중에 집행유예 결격 기간이 지나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선고된 사건은 15.7%인 147건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또 '서울 지법 8개 항소부의 석방률은 최저 3.7%에서 최고 20.9%까지 5배까지 차이가 나는 등 재판부에 따라 선고 결과가 들쭉날쭉 한다'고 지적했다.

이 때부터 판·검사간의 대립은 위험 수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쌓였던 법원과 검찰의 갈등은 결국 이달 초 임창열 경기지사 알선수재 혐의에 대한 항소심을 계기로 폭발하고 말았다.

임 지사 사건은 올해 초부터 판사와 검사가 날카롭게 대립해 온 시한 폭탄이었다. 이 사건 항소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합의 3부(재판장 손용근 부장판사)는 올해 1월 18일 검찰측에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 수재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유죄 판결(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억원)을 받은 임 지사에 대해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내용의 공소 사실을 예비적으로 추가해 공소장을 변경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검찰측은 다음날 바로 "임 지사가 받은 돈이 정치 자금이 아닌 뇌물이 분명한데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추가 기소할 이유가 없다"며 법원의 요구를 즉각 거부했다.

당시 검찰 한 관계자는 "정치 자금법 위반 혐의를 추가하라고 요청한 것은 법원이 알선 수재가 아닌 정치자금법을 적용할 경우 벌금형도 가능해 자칫하면 임 지사가 지사직으 유지할 수있는 길이 열린다"고 법원의 요구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4월 3일 서울고등법원 303호실에서 열린 임 지사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임 지사의 알선수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그동안 곪아온 응어리가 터졌다.

재판부는 "검찰이 법원의 정치 자금법 위반 혐의를 추가하는 내용의 공소장 변경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며 "임 지사에 대한 처벌을 못하게 된 책임은 검찰에 있다"고 화설을 검찰쪽으로 돌렸다.

재판부는 요약 자료까지 준비해 배포하며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객관적인 상황의 기초 조사 없이 무리하게 관련자를 추궁행 혐의를 인정하는 진술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보인다'며 검찰의 무능을 탓했다.


인신공격성 발언 등 힘겨루기 확전

재판부는 나아가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전례를 깨고 "젊은 검사의 정열이 지나쳤다", "남자가 너무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면 자기 여자 못생긴 게 안 보인다"는 식의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했다.

재판부는 수사 검찰 개인을 상대로 한 이 같은 발언은 극이 이례적인 일이다.

검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지검 강력부 권오성 검사는 바로 다음날 서울지검 기자실을 찾아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법원에 대해 강도 높은 맞대응을 폈다.

권 검사는 "임 지사를 조사하면서 피의자라는 호칭 대신 '지사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예우했는데 무슨 강압수사냐, 법원은 피고인의 수차례 읽고 자필로 서명한 사건 기록을 정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피고인의 진술만 맹신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임 지사가 직접 문구를 수정했다는 4, 6회 피의자 신문 조서까지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권 검사는 "법원이 판결문이 아닌 별도 기자회견을 통해 '정열이 지나치다'는 식으로 비아냥하데 대해 법권의 양식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비난했다.

이런 검찰의 강력한 대응에 대해 재판장인 손용근 부장판사는 "판결에 대해 100% 자신한다"며 "자백이 금과옥조가 아닌 것은 기본이다. 검찰이 그 정도의 공소 사실로 유죄를 확신한다는 것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라고 맞받아 쳤다.

법원과 검찰 양측이 침범해서는 안될 선을 넘어 간 것이다.

이외에도 검찰이 약식 기소한 미군부대 독극물 한강 방류 사건의 주범을 법원이 "사안에 비해 약식기소는 적절치 않다"며 정식 재판에 회부하는가 하면, 지난 주에는 검찰이 국기 문란 행위 규정한 총풍 사건에 대해 법원이 '우발적 해프닝'에 불과하다면 관련자들을 모두 집행유예로 풀어 주었다.

검찰과 법원의 힘겨루기가 감정 대결로 확전돼 가고 있는 조짐은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이런 일련이 사건들로 현재 법원과 검찰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있다. 법원은 검찰을 '권력의 하수인'정도로 폄하하고, 검찰은 법원의 잇단 과잉 제스처에 극단적인 불만을 보이고 있다.

최근 검찰측에서는 공소 사실이 법원에서 잇달아 기각되자 내부적으로 해당 사건의 담당 판사들의 성향 분석까지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검사는 "정치인이 관련된 형사 사건은 내부적으로 판사의 출신자나 인맥등을 고려해 대응하고 있다. 어떤 사건은 자체적으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며 "법관은 판결문으로 이야기 해야지 요즘처럼 사적 의견을 다는 것은 올바른 처지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상호견제는 바람직한 현상

판사들도 "검찰이 권력의 시녀 역할을 자차하면서 스스로이 신뢰를 깎아 내린 것에 대해 심각한 자체 반성이 있어야 한다"며 "아무리 조직 자체가 경직됐다 하더라도 잘못된 상부의 지시에는 단호히 거부하며 뛰쳐 나올 수 있는 '지사(志士)' 검사들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국민의 신회를 상실한 검찰은 존립의 위기에 맞게 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검찰의 한 고위 간부는 "우리나라 같은 대통령 중심제의 대륙법 체제하에서 검찰이 정치권의 영향을 전혀 안받는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하다"며 "하지만 법원도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검찰의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 공소권은 검찰의 고유권한이다. 법원이 이를 침해하려는 것은 사법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고 말했다.

판사나 검사를 거치지 않은 '연수원 출신'인 S 변호사는 "최근 법원이 검찰 수사 결과를 잇달아 뒤집고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신뢰를 잃은 검찰과 도매금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차별적인 행보를 가겠다는 움직임으로 보여진다"며 "양측이 상대 시스템을 존중하고 정도를 걷는다면 법원과 검찰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고 진단했다.

배타적 공소권을 가진 검찰과 독립적인 판결권을 지닌 법원의 상호 견제와 건전한 긴장 관계는 사법 정의 구현에 있어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는 법원과 검찰 대립 양상은 제살깎기에 다름 아니다. 국민은 법원과 검찰이 제자리를 찾아 신회를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입력시간 2001/04/1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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