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히로히토와 빅스

올해의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인 '히로히토와 근대 일본 만들기'의 저자인 허버트 빅스 박사(지난주 '역사교수.'로 '어제와 오늘'에 보도)가 15년간 머물렀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본문 686쪽, 참고 노트만 83쪽이나 되는 '히로히토와..'는 히로히토 일황(1901-1989)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중국과의 전쟁, 태평양 전쟁, 항복과 전쟁 책임, 전후 민주입헌군주로서의 일생을 편견 없이 정확하게 쓰고 있다.

이 책에는 빅스 박사가 하버드대 등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연구한 40여년의 노력이 담겨있기도 하다.

이 책은 또 요즈음 일고 있는 일본 교과서 왜곡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지를 적시해 준다. 그의 갑작스런 귀국이나 그의 책을 번역할 일본 출판사를 찾지 못한 점, 일본의 언론이 그의 퓰리처상 수상을 거의 보도 하지 않은 것 등은 이 책에 대한 일본내 비판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60년대 말 하버드대학에서 일본학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일본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읽은 '황도'라는 특이한 말이 계기가 됐다.

마샤츠 대학을 마친 그는 학사장교로 일본에 왔고, 이때부터 일본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제대와 함께 하버드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초의 연구과제는 히로히토가 아니었다. 일본의 엘리트들이 어떻게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그 동력은 무엇이냐는 것.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이 아시아, 미국, 세계에 펼치는 백화점 같은 역사를 보면서 그 중심에 히로히토가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고 방향을 바꿨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중국과의 전쟁이나 미국과의 전쟁은 군부의 강요에 의해 히로히토가 어쩔수 없이 개입하게 됐다는 게 통념이었다.

그러나 연구를 하면 할수록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히로히토의 이중성이 드러났고, 바로 그가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일본 정치의 중심이며 명목상의 입헌군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히로히토는 '군림하고 통치하는 군주'였고, 지금껏 가장된 것과는 달리 일본 대본영의 지휘자였다. 그는 또 식민지 조선을 전쟁에 이용하는 술수꾼이기도 했다.

빅스 박사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그의 조부인 메이지의 은전(恩琠) 모습이 신민(그는 국민을 '臣民'이라 했다)에게 좋다는 것을 알고 1926년 그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던 박열(1902년 생, 문경출신, 재일거류민단장으로 6ㆍ25때 납북) 의사를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감형이 군주권의 월권이라는 논쟁에 그는 침묵으로 맞서는 술책을 썼다는 게 빅스 교수의 해석이다.

또 1931년 6월 만주의 만보산에서 중국과 한국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고 평양 등지에서 127명의 중국인이 살해된 사건을 일본 관동군이 중국 침략의 핑계로 삼았는데, 히로히토는 이를 알고도 모른 체 했다는 것이다.

이듬해 1월에는 이봉창 의사가 기동훈련을 사열한 뒤 궁정으로 들어가는 그에게 폭탄을 던지자 히로히토는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사상범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내각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빅스 박사는 이처럼 히로히토의 '베일에 싸인 인격'을 일본 황도의 절충주의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일본 군주들은 왕이면서 신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신의 권리를 절충해 정치에 개입하고 군사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제위를 보전하고 인간으로서의 생을 누리기 위해 군부, 정치권, 재벌 등과 적당히 절충하고 통제하고 강압했다는 것이다.

1935년 2ㆍ26 쿠테타가 발생, 그의 시종이 살해되고 총리가 피습되었는데도 히로히토는 "빨리 끝내라. 화를 복으로 바꾸라"고 명령했으며, 1938년 12월의 난징 대학살 때는 이미 궁정지하에 차려놓은 대본영에서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히로히토는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고, 전황이 좋을 때는 상황실에서 젊은 군인 보좌관들과 포커를 치기도 했다.

히로히토는 특히 1948년 미국 대선에 출마하려는 맥아더 장군과 절충해 전쟁책임론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맥아더는 정부에 일본을 점령하려면 수백만명의 군인이 필요하다고 협박했다.

결국 "고통스런 사실이나 진실보다 편안한 거짓 역사를 인정하겠다"는 히로히토식 절충주의는 오늘날의 교과서 왜곡에 이르렀다는 게 빅스 박사의 결론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1/04/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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