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받은 개혁파, 발끈한 보수파

한나라당 보·혁 불안한 동거, 끝내 이념적 충돌

"'독버섯', '친일세력'이 당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김원웅 의원)"

"총재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공개사과를 하도록 설득하든지, 설득이 안되면 쫓아내든지 해야지, 이런 식으로 문제를 덮으면 곤란하다." (김용갑 의원)

4월 내내 한나라당이 시끄러웠다. 난데없이 불거진 보혁 갈등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세력이 무지개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던 한나라당이 갑자기 보혁갈등에 빠져든 것은 4월초. 김용갑 최병렬 박관용 의원 등 이른바 당내 보수성향의 뿌리를 이루고 있던 부산ㆍ경남지역 의원들이 별도의 모임 결성을 선언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색깔을 좀처럼 내보이지 않던 보수세력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성향의원들 독자세력화, 개헌론에 제동

3월께부터 삼삼오오 모여서 당내 문제를 논의하던 이들은 4월8일 한 모임에서 "현 시국에서 개헌론을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정경험이 있는 의원들이 모여 당에 분란을 가져올 개헌 목소리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며 독자세력화를 공식화했다.

이들이 모이게 된 직접적 계기는 국가보안법 개ㆍ폐를 주장해왔던 당내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미래연대가 독자적인 국보법 처리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

최병렬 의원 등은 미래연대 회원들과 만찬을 갖고 "지금 당이 분열되어선 안된다. 진보적인 색채는 정권교체가 최대 목표인 당을 위해서 결코 좋지 못하다. 당을 위해서 한번만 참아달라"고 호소했다.

미래연대 회원들도 이들의 호소에 공감을 느끼고 일단 행동을 보류키로 했다. 또 보수파 모임도 무기 연기하는 등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평소 진보적 목소리를 내왔던 김원웅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당내 보수세력들을 "독버섯 같은 존재"로 몰아붙이면서 보혁 갈등의 뇌관을 건드린 것.

김 의원은 홈페이지에서 "정치적 신념과 노선을 함께 하는 인사들의 모임은 어떤 경우에라도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지난 시절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를 갖고 냉전시대로의 회귀를 도모하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 보수라도 수구가 아닌 건강한 보수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발끈한 김용갑 의원 등은 이회창 총재에게 김 의원의 징계를 요구했고, 그 동안 수면 아래 숨어있던 보혁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 예고된 갈등

한나라당에서 촉발된 보혁 갈등은 어찌 보면 충분히 예견된 상황이었다는 것이 당 안팎의 중론이다.

4ㆍ13 총선이후 한나라당은 총선 승리를 위해 대규모 신진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전문성과 개혁성, 당선 가능성 등만 고려했을 뿐 이념적 성향은 크게 가리지 않았다. 따라서 총선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보수와 혁신이 어우러지는 무지개 정당이 됐다.

이처럼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은 지난해 6ㆍ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 차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국가보안법 개정문제, 사립학교법 개정안 처리 등 미묘한 이슈가 터져 나올 때마다 사사건건 갈등의 불씨가 엿보였다. 더구나 지난해 11월에는 김용갑 의원이 "민주당은 조선노동당 2중대"라며 색깔론을 제기, 진보세력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나 진보세력이나 서로 조직적인 세 규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정치철학과 이념이 다른 보수, 진보 세력이 대선 승리라는 절대 목표를 위해 일단 불완전한 동거 상황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세력이 서서히 결집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같은 균형이 깨졌다.

특히 지난 2월초 여야를 초월한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정치개혁을 위한 의원모임'이 결성되고 국가보안법 독자처리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세 규합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한 중진의원은 "당내 주류를 차지해온 보수 원로들 사이에서 진보 진영이 갈수록 영역을 넓혀가는데 가만 있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특히 당의 정체성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보수세력이 제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의 의원들이 세력화를 시도하는 것은 대선전이 본격화하면서 당내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는 복잡한 이해관계도 한 몫 했다. 보수 모임은 애초 김용갑 의원이 발의하고 최병렬 의원이 주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최병렬 의원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당내 2인자 경쟁 등 정치상황을 고려해 당내 주류인 부산, 경남지역 의원들의 소외감을 매개로 힘을 키우려는 의도도 작용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시험대 오른 이회창의 지도력

어쨌든 한나라당내 보혁 갈등은 불가피하게 이회창 총재의 지도력을 시험대에 오르게 했다. 대권 전초전에서 대여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아온 이 총재가 그 동안 잊어버리고 지내왔던 당내 문제까지 신경을 쓰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수와 혁신의 매개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사실 이 총재는 그동안 한나라당내 보수와 진보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최대한 덮어두는 행보를 취해왔다.

하지만 이번 보혁 갈등은 더 이상 덮어둘 수 만은 없는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 총재의 한 측근은 "50년 냉전체제 아래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됐던 보혁 갈등이 당내 분란의 엄청난 불씨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장 중요한 최대 과제인 대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덮어둘 수 만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더구나 이부영 김덕룡 손학규 박근혜 등 한나라당내 비주류 중진들은 개헌론을 고리로 본격적인 2인자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상황이다.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줄 수 없는 절묘한 균형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달래줄 별다른 당근이 없는 이 총재에겐 비주류의 도전과 동시에 터져 나온 당내 보혁 갈등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총재는 본격화하는 대선 가도 속에서 복잡다난하게 얽혀가는 당내 역학 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야 하는 안팎 곱사등이 처지에 놓여있는 셈이다.

이 총재의 한 측근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이 같은 상황은 더 심각하게 총재를 괴롭힐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바야흐로 이 총재의 지도력이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박천호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4/25 15:01


박천호 정치부 tot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