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부시 100일

4월 29일로 취임 100일을 맞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적어도 63%의 국민에게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는 결론을 한 여론조사(워싱턴 포스트-ABC TV)가 내렸다.

그러나 미 텍사스주 '포트 워스 스타 텔레그램'의 여성 칼럼니스트인 몰리 이빈스가 쓴 '관목-조지 W 부시의 행복하고 짧은 정치적 생'(2000년 1월 출간)을 읽은 독자들은 이 결과에 당혹하게 된다. 이빈스는 퓰리쳐상의 논평부문에 세번씩이나 최종심사에 올랐던 유명 칼럼니스트다.

그녀는 1994년 텍사스주 정계에 등장한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프로야구구단 구단주인 부시 대통령이 지난 6년간 주지사로 쌓은 업적이란 '숲'(Bush)를 뒤졌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월스트리트 금융가이자 코네티컷의 상원의원이었고, 아버지가 석유개발업자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부시가문에서 부시는 숲을 이룰 만한 거목, 즉 동량(timber)은 아니었고 관목(shrub)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의 주지사 기록을 검토한 바로는 부시의 세금삭감정책, 교육정책, 공해대책, 재정정책은 '거목'이 되기에는 너무 왜소한 '관목'급이었던 것이다.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사담 후세인(이라크 대통령)을 상대한다니." 이빈스는 부시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전에, 진보적이면서 약간 계급적인 측면이 짙은 시각으로 그를 해학화했다.

그러나 부시 주지사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취임 100일 파티를 백악관에서 여야 의원들과 함께 가졌다.

워싱턴포스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은 여성 칼럼니스트의 예측과는 달리 임기 초반부터 감세 등 굵직한 국내 문제에 매달린 부시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 대통령'이라는데 68%의 지지를 보였다. 정찰기 비상 착륙으로 촉발된 중국과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외교적 능력면에서도 그는 65%의 지지를 얻었다.

다만 1,350명의 조사 대상자중 57%가 "부시가 국민의 사정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또 미국인 가운데 5명중 3명이 그를 신뢰하고 있으며 "예상했던 것보다 잘하고 있다"는 응답이 "못하고 있다"는 대답보다 2배나 많았다.

이 같은 '부시의 100일' 결과는 1993년 4월에 취임 100일을 맞았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지(59%)를 웃도는 것이다. 반면에 레이건은 1981년에 73%였고, 그의 아버지 부시는 1989년에 71%로 부시 대통령보다 높았다.

보수적인 월스트리트저널의 논설 부주간인 데니얼 해닌거는 이에 대해 "100일 만에 이룬 상식의 정부"라는 논평에서 "부시는 지난 40년간 미국에 등장한 정부중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출발해 100일만에 보수적이면서 지적인 면에서 업적을 세운 3번째 대통령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첫번째는 린든 존슨이다.

그는 케네디의 상징인 프론티어 정신의 망령속에서 '위대한 사회'를 주장하며 좌ㆍ우파와 토론하고, 또 설득하면서 복지사회로 가는 기반을 닦았다는 것. 두번째는 로널드 레이건이다. 그는 '극우의 바이러스'라는 극언 속에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게 "저 벽을 이제는 헐자"는 큰 비전과 새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부시도 환경주의자나 평화주의자들에게 '파괴자', ' 신냉전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비전없는 전 대통령의 아들'로 등장했지만 국민에게 만족을 주는 '상식의 정치'를 했다고 해닌거는 분석했다.

닉슨 전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 출신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사파이어는 '역사에 있어서 100일'의 의미를 그의 칼럼(4월26일자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썼다. 역사에 있어서, 특히 미국 대통령에 있어서 100일은 의미는 같다고. 1815년 3월 20일 프랑스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해 파리로 돌아오자 망명길에 나섰으나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색이 짙었던 8월 18일 파리로 돌아왔다.

100일만에 왕위를 되찾은 것이다. 이때 곁에 있던 재상이 말했다. "황제가 없는 '100일의 파리'는 슬픔이었습니다"라고. 이때 '100일'은 바로 변명의 말이었다.

그러나 1933년 3월9일~6월16일의 '100일'간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공사업 확대, 은행단속 강화, 공공 개발법, TVA 건설 등이 의회를 통과하도록 '100일 작전'을 펼쳤다. 미국 대통령의 '100일'은 이때부터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그의 유명한 취임 연설에서 "우리의 이상은 '한차례 100일'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1,000일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100일 동안 금세기의 가장 성공적이고 생산적인 여러 가지 법을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부시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불시착 정찰기의 승무원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부활절을 즐겨야지, 내 연설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에게 국제문제를 자문하는 조지 슐츠 전국무장관은 "100일동안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마라. 가만이 있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판단의 잣대는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차기 우리의 대선 주자들이 참고할 만하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1/05/0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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