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주자 전직 대통령 순례 러시, "과거회귀" 비판

최근 정치권에는 여야 차기 대권 주자들의 전직 대통령 방문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전직 대통령 중에서 가장 활발한 정치행보를 해왔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가가 급등한 것은 물론 한동안 정치권의 관심사에서 벗어났던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 등도 덩달아 '몸값'이 오르고 있다.

특히 김 전대통령을 겨냥한 여야 주자들의 구애 메시지가 잇따르고 있다.


"전직대통령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

대권 주자들의 '전직 대통령 순례' 열풍에 불을 당긴 사람은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

3월29일 열린 자신의 후원회에 "국정경험을 가진 전직 대통령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며 전직 대통령 모두에게 초청장을 보냈던 박 부총재는 '후원회에 축전이나 메시지를 보내준 답례'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직 대통령 릴레이 방문'을 선언했다.

첫 상대는 자신의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념관 설립에 계속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김영삼 전대통령. 박 부총재는 4월13일 김 전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가 2시간 20분 동안 오찬을 함께 했다.

박 부총재가 정치권 입문 후 김 전대통령과 자리를 함께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하지만 회동은 여느 상도동 오찬 때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주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박 부총재와의 회동에서 김 전대통령이 "과거 야당은 투쟁을 무섭게 했어도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은 낭만이 없다. 야당생활 40년을 했지만, 언제나 40%는 비주류 몫이었다.

요즘은 내가 바른 말을 하면 언론에서는 독설이라고 한다"고 '푸념'을 하자 박 부총재는 "그 시절엔 야당에도 낭만이 있었군요. 요즘은 바른 말을 하면 비주류로 분류됩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회동 후 "참 잘 만났다. 전직 대통령의 경륜이 필요한 만큼 앞으로 자주 찾아 뵐 것"이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던 박 부총재는 열흘 후인 24일 다시 노태우 전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찾아갔다.

노 전대통령은 자신을 찾아온 박 부총재에게 "얼마전 고향(대구)을 가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박 부총재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며 "나도 기대가 크다"고 한껏 추켜세웠다.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풍부한 국정경험을 가지고 있는 전직 대통령을 찾아 뵙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고 말하는 박 부총재는 전두환, 최규하 전대통령도 조만간 찾아갈 예정이다.

박 부총재의 '전직 대통령 릴레이 방문'이 언론의 조명을 받자 정치권에선 여야를 가리지 않고 차기 또는 차차기를 노리는 주자들의 '전직 대통령 찾기'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3김은 우리의 운명" 노골적 구애

한나라당 강재섭 부총재는 4월19일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서구의 한 음식점에서 전두환 전대통령과 지역주민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을 했다.

강 부총재는 이 자리에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싹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격려해달라. 그런 (싹수 있는) 정치인이 바로 나 같은 정치인"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전 전대통령도 "김영삼 전대통령이 5ㆍ18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강 의원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반대했던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강 부총재는 우리 정치권에서 보기 드물게 의리, 소신, 용기, 배짱, 지혜, 인정, 결단력 등 정치인으로 갖춰야 할 7가지 덕목을 골고루 갖췄다"고 평가했다.

여권에선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4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평소 '과거 민주화 세력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신민주 대연합론'을 주장해왔던 김 최고위원은 이날 회동에서 "철학과 원칙, 정통성이 같은 YS(김영삼)와 DJ(김대중 대통령)가 협력해 현재의 어려운 국가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김 전대통령은 "DJ는 정권 초기부터 정치보복을 했다. 다 끝난 이야기다"라며 냉정하게 잘랐다.

하지만 "내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설 생각"이라는 김 최고위원의 말에 YS는 "대통령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자리다. 퇴임 후 자유로운 시민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 이왕 마음먹은 만큼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직접 찾아가지 않더라도 전직 대통령에게 노골적인 구애의 손짓을 하는 발언도 잇따르고 있다.

1997년 대선 당시 '세대교체'를 내걸었던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은 4월 17일 한 강연에서 "3김은 우리의 운명이었다. 산업화, 민주화의 고통스런 과정에서 역사를 일궈낸 3김에게 역사적 기회가 주어진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3김을 '재평가'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은 "YS가 많은 국민을 걱정하게 하고 있으나, 그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IMF 위기 등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것은 근본적으로 개발독재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한 탓인데 한 사람(YS)에게만 과도하게 책임추궁을 해왔다"고 말했다.

또 민주당 노무현 상임고문도 4월 18일 "일부 정책 실패에도 불구하고 3김은 역사에 대단히 큰 족적을 남겼다"며 3김을 변호했다.


밑질것 없는 몸값올리기

여야의 차기 주자들이 일각의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전직 대통령을 앞다퉈 찾고 있는 것은 정치적 인지도가 높은 전직 대통령과의 만남 자체가 언론의 주목을 받는 등 자신의 몸값 올리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부 전직 대통령은 여전히 특정 지역에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맹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들과의 관계개선이 자신의 행보에 도움이 되면 됐지 밑질 것 없다는 계산도 작용하고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가장 많은 '손님'을 맞고 있는 것도 여권 일각에서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정계 개편론의 핵심적인 변수를 차지하는 등 복잡다단하게 전개되는 차기 대권가도에서 얼마든지 '상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

김 전대통령 스스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서 굳이 상도동을 찾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사에 암울했던 그늘을 드리웠던 3김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차기 대권 주자들의 '전직 대통령 순례'는 과거회귀 행태라는 점에서 정치권 안팎의 비판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 한 당직자는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벤트에 불과한 만남은 차기 대권에서 여전히 '킹메이커'를 자처하고 있는 일부 전직 대통령을 부추기는 것 밖에 안 된다"고 비판했다.

박천호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5/02 19:06


박천호 정치부 tot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