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밑지는 바둑" 버티는 후지사의 9단

-오청원(吳淸原)의 치수 고치기(20)

후지사와 고라노스께(藤澤庫一朋齊) 9단과 오청원의 10번기를 최고의 빅카드로 생각한 요미우리 신문은 오청원을 9단으로 만들 작정을 했다. 그래서 6,7단 선발 10번기를 기획해낸다. 이 10번기를 통해 오청원을 자연스럽게 9단으로 승단시킬 속셈이었다.

오청원도 후지사와와의 10번기에 반대했다. 상수가 하수를 시험하는 것은 가능해도 하수가 상수를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요미우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지사와가 일본 최초로 9단이 되어 한껏 주가가 뛰고 있을 때 '재야의 일인자' 오청원과 맞붙이는 것은, 이때까지 10번기를 펼쳐온 요미우리라면 기어코 성사시키려고 할 것이다.

오청원은 6,7단 선발 10번기를 통한 9단 승단이라는 기획 의도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창 자라는 기사들을 꺾어놓고 자신이 우뚝 선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둔다'로 결정했다. 6,7단과의 10번기에 출전하기로 맘을 굳힌다.

전후(前後)의 일본 상황은 뒤숭숭하여 사람들의 잡다한 생각을 묻어버릴 수 있는 쇼킹한 이벤트를 찾고 있었기에 바둑도 좋은 '꺼리'가 됐다. 오청원도 바둑기사이기에 어떤 승부라도 물러나는 태세를 보여주는 것은 옳지 않았다.

10번기에 출전한 6,7단은 사실 10명의 신예로 뽑힌 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들이었다.

'타도! 오청원'을 기치로 힘차게 도전하여 왔으나 오청원이 또한 뒤에서 쫓아오는 후배들에게 질 수는 없는 일. 결과는 오청원의 8승1무1패였다. 더구나 모조리 백차례이고 흑을 든 경우는 두 번밖에 없는 불리한 치수였는데도 오청원의 완승이었다.

오청원의 유일한 패배는 구보우찌 6단에게 패한 것이며 '빅'은 스미노 6단인데, 둘 다 관서기원 기사였다는 것은 묘한 결과였다. 당시엔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청원도 일본기원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일부러 져주었다는 억측을 듣기에 딱 알맞은 성적이었다.

이 10번기가 끝나자 오청원은 1950년 2월15일 일본기원에서 9단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36세.

기다렸다는 듯이 요미우리는 후지사와 9단과 오청원간의 세기의 대결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10번기 기획에 나섰다.

오청원이 9단을 받기 직전인 1949년 11월 일본기원에서 '명예객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일본기원에 적(籍)이 없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뜻의 칭호인지 의미도 모른 채 오청원은 그 칭호를 받았다.

드디어 10번기-. 문제가 생겼다. 후지사와 9단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6단 시절 오청원에게 흑번필승의 신화를 이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한 끝에 선상선(先相先)의 치수로 나섰다가 연패를 기록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그런 그가 무슨 원수를 졌다고 오청원과의 사활을 건 10번기를 서두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일본 최초의 9단이다. 일본 최초의 9단으로서 명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위치인데 섣불리 10번기를 해서 치수라도 고쳐진다면, 치수가 문제가 아니다.

설사 패하기라도 한다면 최초의 9단 입장에서는 얼굴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요미우리는 안달이 났다. 신문 기보도 빨리 작성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후지사와 9단이 고집을 부리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미우리가 지금까지 10번기를 기획할 때마다 안 하겠다고 한 기사는 없었다.

그 즈음 하시모토는 이와모토 8단과의 대국에서 혼인보자리를 되찾고 관서기원을 일본기원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뛰고 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하시모토 혼인보와의 2차 10번기였다. 제1차 10번기는 오청원이 치수를 고쳐놓았기에 선상선(先相先)으로 출발하였다.

그래서 오청원은 하시모토와의 예정에 없던 치수고치기를 거행하게 됐다. 반면 후지사와는 시간을 좀 벌고 있었다. 후지사와도 결국엔 10번기의 전장(戰場)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지만.

[뉴스화제]



● 조훈현 유창혁, 춘란배 4강 진출

조훈현과 유창혁 9단이 제3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에서 준결승에 진출함으로써 세계최강 한국바둑은 두번째 우승을 바라보게 되었다.

4월29일 중국 항저우(抗州)에서 벌어진 춘란배 8강전에서 조9단은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 9단에게 백불계승을 거두었고, 유9단은 신예 콩지예(孔杰) 5단에게 흑5집반승을 거두었다.

두 사람외에 4강 진출자는 중국의 위빈(兪斌) 9단을 이긴 대만출신 일본기사 왕리청(王立城), 자국기사끼리 맞붙어 저우허양(周鶴洋)을 꺾은 왕레이(王磊)이다.

춘란배 우승은 이렇게 한국2명, 일본1명, 중국1명으로 좁혀졌는데, 8강까지 5명의 선수를 진출시켰던 중국은 8강에서 4명이 떨어져 왕레이만 남았다.

준결승의 대진표는 조훈현-왕리청, 유창혁-왕레이로 짜여졌으며 대국은 5월25일 중국 시안(西安)에서 시작된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1/05/0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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