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종로구 가회동(嘉會洞)

서울 종로구 가회동은 1914년 4월 1일, 일제가 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옛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동곡(東谷)의 일부와 맹고개(孟峴)와 양덕방(陽德坊)의 계동(桂洞) 일부를 떼어서 합해, 가회방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집들과 높은 빌딩이 들어서 맹고개, 홍술해골, 취운정, 백록동 같은 땅이름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그러나 옛 경기중고등학교 뒤를 넘어가는 고개가 조선조 세종 때 감사(監司ㆍ관찰사)를 지내고 영의정(嶺議政)이 된 청백리(靑白吏)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과 숙종 때 황해감사 충청감사를 지낸 맹만택(孟萬澤)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맹감사고개 또는 맹동산, 맹현(孟峴)으로 불려왔던 곳이다.

그리고 지금의 재동초등학교 북쪽마을에 살던 조선조 정조 때 황해감사 홍술해(洪述海)가 장물죄(藏物罪)를 범해 섬으로 귀양가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구할 목적으로 모반(謨反)하다가 도리어 관아에 잡혀 죽게 되었다.

그의 집을 헐어버리고 집터에 못을 팠다 이 때문에 뒷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못골, 또는 홍술해골이라 불렀다.

가회동의 막바지 삼청동쪽 일대가 북악 산자락인지라 소나무가 울창하고 경치가 절경이었다.

게다가 취운정(翠雲亭), 일가정(一可亭)같은 정자가 그림같이 군데군데 얹혀있고 바위틈에는 맑은 샘물이 그칠 줄을 모르고 솟아, 가히 흰사슴이 노닐만한 곳이라 하여 백록동(白鹿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백록동은 조선조말 우리나라 최초로 서구를 여행, 동양과는 전혀 다른 문물에 접하고 돌아와 나라밖 지구의 저쪽편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리는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을 쓴 유길준(兪吉濬)이 한동안 지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구문물을 알린 유길준을 위험인물이라하여 우포청(右捕靑)에 가두었으나 장위대장(壯衛大將) 한규설(韓圭卨)이 주선, 거주제한을 조건으로 백록동에서 생활토록 했었다.

오늘날 가회동 1번지 북쪽모퉁이가 취운정이 자리했던 곳이다.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지형의 이 곳은 장사가 많이 배출되기도 했으나 정자를 짓고부터는 장사가 나질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 조선조말 나라가 어지려울 무렵, 갑신정변으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당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친청(親靑)파인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당내각을 조직하였다.

이에 청나라 원세개(袁世凱), 장광전(張光前), 오조유(吳兆有)가 일본공사 (竹添進一朗)에게 궁성수호를 바꾸자는 편지를 보내고는 바로 군대를 몰아 창덕궁으로 쳐들어오자 창덕궁을 빠져나간 고종이 백록동에 머물기도 했다.

'嘉會洞'은 글뜻대로라면 '아름다운(선한) 모임의 마을'이다. 이곳에 헌법재판관들이 모여 위헌 여부를 판가름하는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가 자리했다. 땅이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같다.

입력시간 2001/05/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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