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법정에서의 죽음

법정은 엄숙한 곳이다. 때로는 사형이 선고되는 곳이기도 하다. 검은 법복을 입은 판사들이 높다란 법대에 앉아 좌중을 내려다보면서 양 당사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바라본다. 어떤 판사는 마치 석고상처럼 무표정하게 듣기만 한다.

표정이나 반응을 통해 심증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를 당사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판사는 마치 프로 농구의 코치들처럼 사건 진행에 일일이 뛰어든다. 어느 일방에 대해 코치하지는 않지만 재판의 공정한 진행이 자신의 임무라는 생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판사는 법정에서 왕이다. 재판정에서 판사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법원 경찰에 의해 체포 구금될 수 있다. 특히 대부분의 경우, 미국에서 1심 법원의 판사는 글자 그대로 왕이다. 미국의 1심 법원은 사실 판단의 전권을 가지고 있다.

검사가 기소한 사람이 사람을 죽였는지 아닌지, 갑이 을에게 돈을 빌려주었는지 아닌지, 마이크로소프트가 컴퓨터 제조업체들에게 자기네 특정제품을 쓰라고 강요했는지 그리고 만일 안 쓰면 다른 제품을 공급할 수 없다고 위협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안에 따라 1명의 판사가 판단을 하기도 하고 세 명의 판사가 합의해서 결정하기도 하지만, 미국의 경우 1심은 1명의 판사가 담당한다.

물론 실제로는 배심원이 사실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배심원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사실 판단을 할 수 있는지를 판사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배심 재판에 있어서도 여전히 판사는 법정의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더구나 판사가 배심원의 사실 판단이 적법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면 배심원의 결정을 뒤집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 판단은 웬만해서는 상급심에서도 뒤집을 수 없다. 이것 역시 우리 나라와 다른 점이다. 미국의 2심에서는 1심에서 내린 사실 판단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하지 않고, 판명된 사실에 법률을 제대로 적용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판정할 뿐이다.

사실판단에 대해서는 1심 판사의 재량권을 충분히 인정하고, 2심에서는 그 재량권이 남용되었는지만 살펴볼 뿐이다. 따라서 1심 법원 판사는 법이 인정한 재량권의 범위 내에서는 법정의 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군림하는 왕은 네로 황제와 같은 폭군이 아니라, 플라톤의 철인 정치에 나오는 이상적인 군주인 경우가 많다. 그것도 200여 년 이상 발전돼온 판례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인 재량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인 것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판사이니 만큼 자신의 법정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얼마 전 1심 법원에서 재판을 받으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죽었다. 그는 법정에서 갑자기 몸을 비틀면서 숨을 쉬기 어렵다고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판사는 그의 요구를 무시하고 재판을 계속 진행시켰다. 계속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재판에 방해가 된다며 법정 경찰을 시켜 그 사람을 법원내 구치감으로 옮겨 버렸다. 나중에 속기록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판사는 그 사람에 대해 농담을 하기도 했다.

구치감에 옮겨진 사람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한 법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홈리스로 지내다가 경범죄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두했던 이 사람은 5분이 멀다 하고 사이렌을 불면서 달리는 구급차가 그렇게도 많은 미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의료진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일로 70세가 넘은 담당 판사는 사임을 하게 될 것 같다. 형식적으로는 휴가를 떠났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휴가라고 한다.

하루에 100여건이 넘는 교통사고와 경범죄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그리고 흔히 거리의 홈리스들이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고통을 호소해온 것을 너무 많이 보아온 판사의 입장에서는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외침이 또 다른 연극으로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비극을 그 판사만의 잘못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이나 피부 색깔, 모양새,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다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만 더 간절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길 뿐이다.

박해찬 미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1/05/1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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