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가족풍속도] “부모 품이 좋아” 캥거루족 급증

취업난ㆍ경제불황으로 '어른 아이'양산

IMF 환란으로 인한 가족형태의 변화는 '캥거루족(族)'이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기생(寄生)독신자'로도 불리는 이 신조어는 성인의 생활양식을 캥거루의 특이한 생태에 빗댄대서 유래됐다.

우선 캥거루의 생태를 보자. 캥거루는 태반의 발달이 매우 나쁘기 때문에 새끼는 크기 1~2cm 내외의 미성숙 상태로 태어난다. 출생 직후 새끼는 혼자 힘으로 어미 배에 있는 육아낭으로 기어들어가, 이 속에 있는 4개의 유두 중 하나에 달라붙는다. 이후 새끼는 종에 따라 6개월~1년간 육아낭 속에서 성장한 뒤 비로소 독립한다.


어른 노릇 못하는 어른

캥거루족은 결국 성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캥거루족은 생활의 일부나 대부분을 부모에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어른노릇을 못하는 어른'이란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캥거루족의 연령대는 상당히 넓다.

대학가에서는 IMF가 몰고 온 취업빙하기를 건너뛰기 위해 휴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통해 사회진출을 최대한 늦추는 이들을 지칭한다. 졸업했다 하더라도 취업을 못했거나, 취업했지만 독립을 늦추고 계속 부모에게 신세지는 사람도 캥거루족에 포함된다.

K(27ㆍ서울 강남구 일원동)씨는 지난해 대학원 졸업 뒤 모 전자회사에 병역특례로 취업했지만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대학원 2학기를 마친 후 부모의 지원으로 캐나다 어학연수를 1년 다녀온 경험도 있다.

그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고, 부모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한 뒤 독립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K씨는 2녀2남 중 막내다. 누나들은 결혼했고, 형은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

K씨가 부모와 동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이다. 함께 살면 환갑지난 부모도 덜 외롭고 자신도 식사와 빨래를 비롯한 가사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력부족이다. 최소한 전셋집과 가재도구를 구해야 하지만 100만원 가량의 월급으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월급을 통째로 부모에게 드리고 용돈 30만원씩을 받는다.

그는 부모에게 신세지는 것을 독립을 위한 과도기로 생각하고 있다. 결혼하면 부모님의 도움과 융자를 보태 집을 얻어 분가할 생각이다.

캥거루족이 의존하는 대상이 부모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S(28)씨는 올 2월 서울 모대학 화공과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아직 취직을 못했다. 고향이 지방이라 S씨는 대학시절부터 누나와 함께 살아 왔다.

당초 누나와 함께 자취를 했던 그는 누나가 3년전 결혼하자 아예 신혼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맞벌이 부부인 누나와 매형은 지금까지 그에게 싫은 내색은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입장이 다르다.

대학원 졸업 후에도 신세를 지려니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지만 '취직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얹혀 산다. S씨의 용돈은 고향의 부모가 보태준다.


부모봉양, 생활비절약 의미도

캥거루족이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통적 부모 봉양의 견지에서 보자면 긍ㆍ부정 판단이 애매한 경우도 있다. Y(31ㆍ서울 서초구 방배동)씨는 직장생활 5년째로 A전자회사 과장대리다. 아직 미혼으로 대학시절이나 다름없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가 부모에게 얹혀사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형편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부모도 그에게 집을 마련해 줄 정도의 능력은 있고, 또 그럴 의사도 있다. 그가 독립하지 않는 것은 앞으로 부모를 모신다는 생각 때문이다.

외아들인 그는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를 봉양할 생각을 갖고 있다. 결혼 후 3년간은 분가해 살더라도 그후 다시 들어올 계획이다.

취직 후 부모에게 얹혀사는 캥거루족이 수입을 관리하는 유형은 대체로 2가지로 나뉜다. 우선, 월급을 몽땅 부모에게 드린 뒤 용돈을 타서 쓰는 유형이다.

이 경우 저축 등 재테크는 부모의 몫이다. 월급은 부모에 드리되, 상여금을 용돈으로 쓰는 사람도 이 유형에 속한다. 둘째는 자신이 직접 돈을 관리하면서 부모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리는 유형이다.

뜻하지 않게 캥거루족으로 환원된 사례도 있다. K(36)씨는 1999년 처(34)와 딸(5)을 데리고 염치불구 처가로 들어갔다. 일산 신도시에서 사업을 벌였다 부도가 나는 바람에 거리로 나앉게 돼 도리가 없었다.

자녀를 모두 결혼시키고 적적하던 차라 장인과 장모는 사위를 자식 대하듯 배려했다. 하지만 K씨는 자격지심 탓인지 장모와 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올 6월께 다시 독립할 생각이지만 계획대로 될 지가 걱정이다.

J(34)씨는 캥거루족으로의 환원이 파경으로 연결된 케이스. J씨는 대학재학 중 미국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제대로 적응을 못했다. 주변의 소개로 들어간 무역회사와 벤처업체 등에는 얼마 붙어 있지 않고 뛰쳐 나왔다. 본인의 기대수준이 지나치게 높았던 탓이다.

결혼할 때 부모가 전세 아파트 비용을 댔다.

부모가 전세를 얻어준 게 잘못이었을까. J씨는 사업을 한답시고 전세를 빼고 대신 가족과 함께 본가로 들어왔다. 사업은 또다시 실패. 이번엔 처가 참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실망감이 깊어지는 만큼 시부모와의 간격이 커졌다.

마침내 처는 다섯살 난 딸과 함께 친정으로 가버렸다. 뺏어오다시피 딸은 데리고 왔지만 처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캥거루족으로 환원된 지 2년만에 이들 부부는 별거상태에 들어갔다.


자기가 번돈은 유흥비로…경제에 악영향

캥거루족의 규모는 정확히 계산돼 있지 않다.

다만 취업난과 경제불황ㆍ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캥거루족의 규모도 커진 것은 분명하다. LG경제연구원의 이지평 연구원은 지난 3월 연구보고서를 통해 부모와 동거하는 20~34세 독신자(기생독신자) 수를 467만명(2000년 말 기준) 이상으로 추산했다.

이 수치는 1995년의 428만명에 비해 40만명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 연구원은 기생독신자를 '부모와 동거하면서 주거, 가전제품, 자동차 등을 거의 공짜로 이용하되, 자기가 번 돈은 유흥비 등에 쓰는 젊은이'로 개념정의했다.

이지평 연구원은 기생독신자 증가의 원인을 취업난과 젊은층의 독립심 부족에서 찾았다. 나아가 그는 기생독신자의 증가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생독신자의 소비행태상 국내총생산(GDP)이 잠식되고 고급 브랜드 수입이 증가하는 반면, 주택과 가전제품에 대한 수요는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생독신자 증가는 일본의 궤적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장기 경제불황과 실업난 등으로 기생독신자 수가 이미 1,000만명을 넘었다.

일본의 경우 기생독신자 증가는 경제회복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총인구를 감안할 때 한국의 기생독신자 규모는 일본보다 오히려 크다. 캥거루족 증가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5/16 11:49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