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新設洞)

신설동은 조선조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이었다. '방(坊)'은 동네호수가 60여호이상 150여호에 이를 때 붙여졌던 마을단위이다. 방 밑에 '계(契)'가, 계 밑의 작은 촌락을 '동(洞)'이라 하였다. 마을에 스캔들 같은 화제거리가 떠돌면 "동네 방네 소문 났네"하는 '동네 방네.'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숭실 방안에는 신설계가 있었고, 신설계 속에 탑동(塔洞), 우선동(遇仙洞), 안암동(安岩洞), 새말(新里) 등의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성밖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숭신방과 인근 인창방(仁昌坊)을 반씩 쪼개 인창방의 가운데 글자 '창'자와 숭신방의 '신'자를 합성, 창신동(昌信)이라는 이름으로, 머리 글자만 합성, 숭인동이라는 엉뚱한 땅이름을 만들었다.

우선동에는 하정(夏亭) 유관(柳寬)을 기리는 '우산각(雨傘閣)'이 있었다.

유관(1346~1433년)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고려말 1371년(공민왕 20년)에 문과에 급제, 전리정랑(典理正郞),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고려말기에는 봉산군수, 성균사예(成均司芮), 사헌중승(司憲中丞)등을 역임하였다.

또,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거침없이 개혁의 선봉에 서서 개국원종공신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왕명에 따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1397년(태조 6년) 좌산기상시(左散驥常侍), 대사성을 거쳐, 1401년(태종 1년) 대사헌, 1405년 전라도 관찰사,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 외교활동도 했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태조실록'을 편찬을 주관하였으며, 우의정을 지내고 세종때 청백리에 올랐다. 그가 청백리로 천거된 데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경지락(漢京識駱)'에 따르면, 유관은 도성밖 숭신방의 조그마한 오두막 집에 살았는데 생활이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어느 누구도 정승의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가 오기만 하면 지붕이 새므로 방안에 우산을 받치고 있어야 했다.

어느해 여름 장마가 계속되어 천정에서 끊임없이 비가 새자 유관은 우산을 쓰고 책을 읽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이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어, 새는 비를 피할 수 있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유관은 "임자말이 일리가 있구료!" 하면서 쓰고 있던 우산을 벗어 이웃사람에게 주었다.

그 뒤부터 동리 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일러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고, 이 동네는 우산각이 있다하여 우산각리 또는 우선리로도 불리었다. 우산각리의 발음이 변해 우선동(遇仙洞)이라 쓰기도 했다.

이 우선동에 날이면 날마다 유림(학생)들이 모여들어, 유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학문을 논의하곤 했다.

일제는 이 우산각을 주목, 도시계획을 핑계로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에서 길의 방향을 바꿔, 직선도로를 뚫었다. 지금의 '종로-왕산로-망우로'를 잇는 도로이다. 일제의 도로 개설로 우산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옛 신설계의 이름을 따, '새로운 마을이 설치되었다'는 글뜻처럼, 신설정(新說町)이라 한 것이 오늘의 신설동이다.

여름 장마비에 방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던 하정(夏亭ㆍ여름 정자) 유관. 그의 일화에서 선비의 청빈낙도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입력시간 2001/05/2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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