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웃겨라" 昌의 변신

이회창 총재, 유머감각 키우며 '이미지 메이킹'에 공들여

스승의 날인 5월15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일일교사로 서울 전농동에 있는 해성여중을 찾아갔다. 야당 총재로서 강인한 이 총재를 떠올린 듯 학생들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연단을 주시했다.

하지만 이 총재의 '특별수업'이 시작된 후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학생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1시간 남짓한 강연 내내 자연스러운 농담이 계속됐고, 학생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 총재는 연단에 서자마자 10대들의 우상인 H.O.T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제 H.O.T가 해체된다는 소식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여기에 있는 학생들은 거기에 가지 않았죠? 오늘 만큼은 H.O.T보다 선생님을 생각하세요."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자 이 총재는 "내 얼굴색이 하얀데, 볼만 빨갛다고 나를 피카추라고 부르더군요"라며 자연스럽게 농담을 건넸다. 난데없이 피카추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강연이 끝날 무렵 한 여학생이 던진 "어떤 남성이 배우자로 좋은가"라는 물음에는 "나 같은 사람이면 된다"고 답해 폭소가 터져 나왔다.


어색했던 유며, 갈수록 '세련'

사실 이 총재는 유머가 몸에 배인 정치인은 아니다. 간혹 총재단 회의 등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유머를 던지기도 하지만, 웬지 타이밍이나 주변 분위기와 맞지 않아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이 총재의 한 측근은 "회의 시작전이나, 끝날 무렵 총재가 농담을 건네기도 하지만, 별로 재미는 없다. 똑 같은 내용의 농담을 하더라도 총재가 하면 썰렁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던 이 총재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초. 한나라당 당사에서 열린 헌혈행사에 참석하고 내려오던 이 총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자들과 조우했다.

이 총재는 이 자리에서 "기자들이 놀랐다면서? 찔러도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줄 알았던 내가 헌혈한다고"라고 깜짝 놀랄만한 농담을 건넨다. 엘리베이터 안이 웃음바다가 된 것은 물론이다.

이후 당직자회의는 물론, 기자간담회, 외부강연 등에서 이 총재의 농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농담이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총재가 기존의 분위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한 점. 4월29일 이 총재는 당 사무처 직원과 소속 보좌관 가족들을 국회 의원회관으로 초청, '고해'라는 영화를 함께 관람했다.

이 자리에서 이 총재는 "그 동안 늘 여러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왔지만, 내가 표현을 잘못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데다, 오랜 판사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투른 것 같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라고 자기 고백을 한다.

평소 이 총재의 '서투른 애정표현'에 내심 불만을 품어왔던 당직자들 입에선 자연스럽게 "총재가 많이 변했다"라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5월17일 이화여대 학생들과의 인터뷰에서는 평생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자 "중학교 1학년 때 가출을 했는데, 엄했던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 가슴에 꼭 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시간"이라고 지극히 감상적인 추억의 순간을 고백,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 자리에서 이 총재는 자신을 세 단어로 표현해달라는 주문에 "한없이 사람좋은 이회창"이라고 넉살 좋게 받아 넘기기도 했다.

세심한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 차렸겠지만, 이 총재는 4월말 자신의 머리색깔을 3년 만에 갈색으로 바꾸었다. "머리 빛깔이 하얗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도 얼굴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진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머리 염색을 한 것. 부인 한인옥씨도 "연한 갈색으로 바꾸면 훨씬 더 부드러운 인상을 줄 것"이라고 권했다.

결국 가회동 자택에서 부인 한 씨의 '감독'하에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한 미용사로부터 세심한 머리손질을 받았던 이 총재는 염색 후 서울 강남지역 지구당 위원장들과의 만찬에서 "훨씬 친근감을 준다"는 호평을 받고 매우 흡족해 했다는 후문이다.

총재실 관계자들은 앞으로 몇 차례 더 다른 색깔로 염색을 해본 후 가장 어울리는 색조를 찾아내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쪽에서 부드러운 남자로 변신

농담을 던지기 시작한데 이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화법, 머리 색깔의 변화 등 이 총재가 꾀하고 있는 일련의 변신을 들여다보면 그 지향점은 한결같이 '편안함'이다.

그 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딱딱한 법관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치밀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총재의 한 측근은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을 거쳐오며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대쪽의 이미지가 결국 정대 스님의 '정치보복으로 피를 부를 정치인'이라는 발언 파문을 가져왔다는 지적이 많았다"며 변신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즉 차기 대권을 위해서는 이 총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대쪽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총재측의 판단인 셈이다.

'부드러운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전환은 올 초 이 총재가 '국민 우선의 정치'를 표방하고 나서면서 일찌감치 예견됐던 일이기도 하다.

민주당, 자민련, 민국당의 3당 연합으로 구체화된 여권의 '이회창 포위전략'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치권의 이합집산'이라는 기존 정치의 변수 대신 '국민 우선의 정치'라는 새로운 변수를 선택한 이 총재로서는 국민 속에 파고드는 이미지 변신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유롭지 못한 사람이 여유를 보일 수는 없는 법. 이 총재가 이미지 변신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자신감이 뒷받침이 됐기 때문이다.

4ㆍ26 재ㆍ보선의 압도적인 승리로 대여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지지도가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는 등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면서 이 총재의 변신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같은 연유다.

5월18일 이 총재는 광주에서 열린 제21주년 광주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 총재가 정부 주최 기념식에 참석하기는 처음. 망월동 묘역에서 광주시민의 남다른 환대를 받았던 이 총재는 기념식이 끝난 후 광주시지부 당직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우리는 이제 망망대해에 던져진 피난자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당의 기운을 펼쳐 나가자"고 호소했다. '적의 심장부'와도 같은 광주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발언을 던진 셈이다.

그 만큼 여유로운 이 총재의 속내를 보여준다. 자신감을 토대로 시작된 이 총재의 이미지 메이킹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주목된다.

박천호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5/22 21:25


박천호 정치부 tot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