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역사법정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6월부터 문제의 '왜곡 교과서'를 일반인들에게 시판한다고 한다. 판매 목표는 무려 100만부 돌파다.

그러나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5월 21일 일본 아와지시마에서 열린 전직 정상모임에 참석해 일본의 역사왜곡에 일침을 가했다. "독일은 히틀러 치하에서 침략을 강행했으며 일본도 똑같은 침략국이었다. 그런데 일본에는 침략을 미화하는 교과서가 등장했다.

모든 인간은 앞으로 침략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

역사문제는 관용의 정신에 입각해서 바라봐야 한다.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독일이 침략을 반성하기 쉬운 측면이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슈미트 전 총리가 말하는 '관용의 역사정신'에 대한 실증으로 독일과 프랑스 형법은 나치 시대의 홀로코스트(유태인 집단학살)를 부정하는 것을 막고 있다. 이를 부정하는, 즉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법에 의해 구속 기소된다.

이런 '관용'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하는 신 나치주의 역사학자들은 독일과 프랑스가 아닌 영국법정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치주의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어빙이 1996년 9월 팽귄 출판사와 데보라 림스타트 교수를 대상으로 낸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이다.

이 재판은 2000년 4월 11일 피고소인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이 '역사법정'에 관한 책 2권이 지난 4월에 나왔다. '법정에 선 홀로코스트'와 '히틀러에 관한 위증역사, 홀로코스트 그리고 데이빗 어빙'이 그것이다. 아직도 4권이 집필되고 있다고 한다.

'법정에 선 홀로코스트'는 역사법정을 추적 취재해 뉴욕타임스와 월간지 애틀랜틱에 보도한 D.D 구텐프랜의 역저. 다른 하나는 역사법정의 피고소이었던 에머리대 여교수(히브리 역사 전공) 림스타트를 위한 전문가 증인이었던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 교수 리차드 이반스('역사학을 방어하며'의 저자)가 쓴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서평에서 두 책을 나치주의 선전가인 데이비드 어빙('히틀러의 전쟁' 등 30종의 나치 관련 저서의 저자)의 정체를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밝혀낸 역사 교과서라고 평했다.

구텐프랜은 나치 역사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였다가 저널리스트로 방향을 바꾼 역사학도. 그는 법정에 서기 전후의 어빙을 추적해 "히틀러가 되어버린 소외된 문필가가 어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38년생인 어빙은 해군장교였던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영국의 계급사회, 즉 기존 사회질서에 크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영국군이 독일 드레스덴을 폭격해 20만명의 독일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반영(反英) 성향의 책을 써 작가가 됐고, 히틀러의 추종자들과 함께 '히틀러의 전쟁'(1977년 출간)이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다. 그에게 히틀러는 가난을 벗어나게 하는 자원이었을뿐 역사의 자료나 교훈은 아니었다.

그는 90년대 들어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인기를 잃자 신나치주의 그룹의 대변인이 되었고, 이를 선동하는 연설가로 변신했다. 이에 림스타트 교수는 1993년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며' 라는 책을 통해 '어빙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홀로코스트 부정의 대변인'이라고 적시하게끔 되었다.

역사법정에서 림스타트 교수 편에 선 이반스 박사는 '히틀러에 관한 위증역사.'에서 어빙을 '어림도 없는 역사가' 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어빙이 히틀러에 대해 거짓을 말한 위증자라고 강조하면서 '역사학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어빙의 정체를 정확히 밝혀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법정에 섰다고 밝혔다.

이반스 박사는 어빙의 책은 물론 어빙이 인용한 자료, 강연 테이프 등을 3명의 조교와 함께 2년여간 분석한 뒤 책을 썼다. 그가 밝혀 낸 것은 어빙이 역사가라는 미명아래 히틀러에 관한 서류, 문건, 대화, 일기를 부분적으로 삭제하거나 오역해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와 관계없는 사람'인 것처럼 조작한 점이다.

이반스 박사는 "역사는 좌나 우에 서서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은 비록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믿더라도 이를 조작, 주장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해석일 수 없다. 역사는 사실인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역사의 정의를 되새김으로써 '역사를 위증하는 히틀러'가 되어 버린, 그래서 역사를 왜곡한 어빙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일본의 침략 역사도 이와 마찬가지다. 한국 등에 대한 침략과 만행에 대한 일본의 역사 왜곡은 관용정신으로 덮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도 일본이 스스로 역사법정에 서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1/05/2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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