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후지사와의 버티기 무너뜨리기 괴력

- 오청원(吳淸原)의 치수 고치기(23)

피차 한발도 물러설 곳이 없다. 전면전. 이 전면전이 벌어지자 바둑은 단명국이 예상되었다. 운명의 시간은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흑은 백 모양을 깔아뭉개려 하였고 백을 든 오청원도 자신의 집 속으로 쳐들어온 흑을 소탕하러 나섰다. 장렬한 공방전은 끝끝내 한 수 부족한 흑이 돌을 거두고 말았다. 94수만에 오청원 불계승. 단명국이었다.

그런데 한 수 모자란다는 것은 착각이었고 오청원이나 후지사와나 판을 잘못 보고 있었다. 종국후 기록계가 그 '수순'을 지적하자 두 사람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수를 잘못 본 것은 역시 천하를 양분하는 기계(棋界) 최초의 9단과 언더그라운드 바둑 대부가 2년여만에 속개된 바둑에서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수를 잘못 보아 돌을 거두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당시엔 멋있게 수를 다 놓아보지 않고도 안 되는 수면 돌을 거두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므로 간혹 실수는 있을 수 있었다. 후지사와로서는 불운하게 패했다고 할 수밖에.

제2국은 오청원의 흑차례였는데, 거의 승리를 거두는 장면에서 과수(過手)가 튀어나와 '아차'하는 순간에 역전당하고 말았다.

제3국은 백차례. 우세한 흑을 필사적으로 따라잡아 빅을 만들었다. 제4국에서는 다시 흑차례인데, 패하고 말아 4국까지는 오청원이 1승2패 1무승부였다.

오청원은 덤이 없는 시합에서 흑을 들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지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더욱이 제5국은 오청원이 백차례가 아닌가. 여기서 진다면 1승3패1무승부가 되어 대단히 괴로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 오청원에게 5국은 중차대한 한판이었다.

흑차례인 후지사와 9단은 단단하게 두어 나가 이틀째 끝나도 흑의 흐름은 흐트러진 데가 없이 백이 밀고 들어갈 틈조차 주지 않았다. 흑을 들면 이런 점이 유리한 것이다. 두텁게 기다리다 백이 무리를 하면 그때 가서 과실을 따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어지간히 기력 차이가 나지 않으면 흑으로서는 잘 패하지 않는다. 테니스에서 서비스권을 가진 쪽이 가진 유리함이랄까. 흑을 들면 당연히 이기는 것이고 백으로 한번쯤 이기게 되면 번기(番棋)는 유리하게 진행되는 셈이었다.

3일째 저녁 쌍방이 필사적인 승부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전이 되어 주위가 침침해졌다.

그러나 오청원과 후지사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정전에는 익숙해 있어 승부에 몰두하고 있는 두 사람은 전등이 꺼져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불이 들어오면 "앗 차차!"하고 놀라면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어 제쳤다.

결국 제5국은 전등이 켜진 다음부터 격렬한 싸움바둑으로 대바꿔치기 끝에 백이 승리를 가져갔다. 쌍방이 테니스에서 말하는 상대의 서비스권을 따내는 악전고투 끝에 2승2패 1무승부로 균형을 이루었다.

제6국이 분수령이다. 제5국까지의 명승부는 이제 다 지난 일. 나머지 다섯판에서 한판만 이기면 치수가 고쳐지는 일은 없다. 서로 4승차가 나야만 치수를 바꿀 수 있다는 약속에 따라 1무승부가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즉 어느 한쪽이 1승을 거두어 3승1무가 되면, 설사 상대는 전판을 모조리 이긴다 하더라도 6승3무1패밖에 안 된다. 6승과 3승은 4승 차이가 아니므로 자존심은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청원의 괴력이 발휘된다. 후지사와 9단의 버티기도 이제 기운이 다되었던지 오청원은 6국부터 10국까지 내리 5연승을 거둔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오청원-후지사와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그렇게 치수가 고쳐졌다.


[뉴스화제]



●이창호 LG배 우승, 통산 100회 우승기록 달성

이창호가 극적인 2연패 뒤 3연승으로 LG배 통산 3회 우승을 달성했다.

5월 21일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벌어진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5번기 최종국에서 이창호 9단은 이세돌 3단에게 242수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고 대역전의 드라마를 펼쳤다. 이번 우승으로 이창호 9단은 통산 100회 우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창호 9단은 1989년 제8기 바둑왕전에서 만14세의 나이로 첫 타이틀을 획득한 이래 이번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으로 만12년만에 100회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입단연도로 보면 만 16년만에 이룬 쾌거다.

● 이창호 9단 인터뷰


- 오늘 바둑내용은 어땠는가?

"전투와 접전이 계속돼 어려웠다. 나중에 좌상귀에서 패가 났고, 바꿔치기의 결과가 좋아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 초반 2연패를 당했을 때 기분은?

"이세돌 3단의 기력이 충분히 강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2연패를 당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용적으로도 완패였다."


- 나이 어린 도전자를 맞아 부담이 컸을 듯 한데?

"초반 2연패를 당했을 때만해도 꽤 부담이 되었는데, 막상 연패를 당하자 마음이 가라앉아 오히려 편하게 두었다."

● 이세돌 3단 국후 인터뷰


- 후반 3연패의 패인은?

"경험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실력이 약했다. 쓰지만 보약으로 생각하겠다. 3연패의 충격이 당분간 가겠지만,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계기로 삼겠다."


- 승부의 분수령은?

"결승 3국이 아쉬웠다. 좋은 바둑이었는데 놓치고 말았다. 4국과 5국은 완패였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1/05/29 18:5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