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받는 기초학문 '붕괴 위기'

교수사회 중심으로 '위기론' 확산, 교육정책 정립 시급

'기초학문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새삼 커지고 있다. 1999년부터 'BK(두뇌한국)21 사업'이 본격 추진되면서 기초학문이 외면당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인문학의 위기'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한동안 떠들썩하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유야무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교수사회 전반이 술렁이는 데다 대통령까지 나서 '기초학문 육성책 마련'을 지시하고 나섰다.


기초학문 위기 공감대 확산

5월 18일 서울대 인문ㆍ사회ㆍ자연대학 등 3개 단과대학 교수 352명이 '기초학문 외면정책 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22일에는 서강대 교수 207명이 이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23일에는 '전국 대학 인문학연구소협의회'가 "조만간 기초학문분야 연구자들의 의견을 취합해 공동의 목소리를 낼 방침"이라고 밝혔다.

연세대와 고려대, 이화여대 등 주요대학 교수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연세대 문과대학의 한 교수는 "단기성과에만 집착해 기초학문분야를 포기하는 것은 국가 차원의 자살행위"라며 "성명서 형식으로 교수들의 의견을 취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기초학문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정부기관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은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최근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0%가 5년 이내에 직장을 떠나겠다고 대답하는 등 기초과학분야 종사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위기감은 상당하다"고 밝혔다.

서울대 교수들의 성명서 발표를 주도한 황수익(黃秀益) 사회대학장은 "기초학문 전공교수들의 위기의식은 심각한 수준"이라며 "교육당국이 사태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당국·대학행정에 교수들 반발

서울대 교수들의 위기의식에 불을 지핀 직접적인 요인은 '교직원 수첩'이다. 지난달 대학본부가 발행한 교직원 수첩에는 문리대(文理大)의 전통을 존중, 인문ㆍ사회ㆍ자연대학을 앞에 배치하던 예년의 관례를 깨뜨리고 단대 순서를 '가나다' 순으로 명기했다.

이에 해당 단대 교수들이 "기초학문을 경시하는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났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440여명의 교수들이 수첩을 반환했고, 3개 단대학장들은 한달 가까이 학장회의에 불참, 대학행정에 차질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학본부측은 "행정의 편의상 '가나다' 순서를 적용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뒤 수첩을 재발행하는 등 진화에 나섰지만 악화된 상황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교수들은 "수첩사건은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았다. BK 21이 추진된 이래 교육당국과 대학행정에서 기초학문이 지속적으로 외면받아 왔다는 얘기다. 또 모집단위 광역화 등 새로운 입시제도가 기초학문의 토대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현실인식도 작용했다.

최근 지원자가 없다는 이유로 철학과를 폐지한 호서대의 경우도 학계에는 큰 충격이었다.

교수들은 무엇보다 학부제와 모집단위 광역화를 기초학문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꼽는다. 학문분야간 심각한 불균형을 낳았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학부제를 시행해 온 서울대 자연대의 천문·지질·해양학과 등은 지원자가 급감, 30~40명이던 정원이 절반 이하로 축소된 상태다. 해마다 인문대 한 학년생 400여명 중 20여명이 법대나 경영대로 옮겨가고 있으며 그 숫자도 매년 늘고 있다. 올해 인문·사회·자연대 등 기초학문분야의 대학원 충원률은 70% 안팎에 불과했다.

고려대도 지난해 서양어문학부생 283명 가운데 정원 110명인 영문과에만 198명이 집중적으로 몰렸다. 연세대 유석춘(柳錫春ㆍ사회학) 교수는 "2002학년도부터 모집단위 광역화가 전면시행되면 이 같은 불균형은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학부제·모집단위 광역화가 불균형 초래

정부와 대학측의 응용학문에 대한 편중 지원도 기초학문의 위기를 심화시킨 요인이다.

연세대의 경우 올해 BK21 국고지원비 가운데 기초학문 지원금은 53억원에 불과한 반면 응용학문의 경우 2배가 넘는 135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과학기술부의 이공계열 연구지원비 가운데 기초과학연구에는 1,700여억원이 지원된 반면 응용학문분야에는 4,300여억원이 지원됐다.

또 국무총리실 산하 인문사회연구회에 속해 있는 9개 연구기관의 예산(800억원)을 합쳐도 정부산하 응용기술분야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올해 예산 1,150여억원에 훨씬 못미치고 있다.

학문 성격을 무시한 단기간의 실적 위주 평가나 교수업적평가도 기초학문을 고사(枯死)시키는데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BK21 사업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부지원금이 1년 단위의 연구실적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어 근시안적인 연구가 만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 신용하(愼鏞厦) 교수협의회장은 "학문의 성격을 무시하고 1년을 단위로 교수들의 연구성과를 평가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저급한 경제논리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기초학문분야 종사자의 취업률 하락도 연구자들이 기초학문을 외면하는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서울대 윤원철(尹元澈려쓩냘? 교수에 따르면 96년 이후 배출된 인문학 박사 355명 가운데 34.6%만이 전임강사 이상의 정규직 교수로 채용됐다. 이는 이전 5년간의 수치에 비해 절반 수준이었다. 동국대 취업관리실 관계자는 "기업에서도 당장 구체적인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응용학문 분야 졸업생만을 선호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부지원이 유일한 대안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기초학문의 육성 주체는 정부"라고 단언했다. 학문의 성격상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기 힘든 분야에 사(私)기업의 지원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응용ㆍ첨단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토대학문이 굳건히 서야 하며 이는 정부차원에서 포괄적ㆍ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맥을 같이 한다.

서울대 조동일(趙東一·국문학) 교수는 "단기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서도 성과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게 기초학문의 성격"이라며 "정부지원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단언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기초학문을 보호ㆍ육성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며 "조만간 기초학문 육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BK21 사업은 시행과정에서 나눠먹기식 등 '부실'이 지적되기도 했다. 이 사업의 공과는 현재 진행중인 감사원의 감사로 드러날 것이다. 상당한 반발속에 BK21 사업을 강행했던 교육부는 이번 만큼은 기초학문을 살릴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상층부의 한마디에 오락가락하는 교육정책으로는 교육이 살 수 없다.

양정대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1/05/30 18:43


양정대 사회부 torc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