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용산구 둔지산(屯之山)

서울 용산 일대의 옛 땅이름은 기름진 들판이란 뜻읠 부원이었다. 한강이 먼 상류로부터 실어나른 퇴적물이 쌓이고 쌓인 땅이기에 기름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행정적으로 과주현(지금의 과천)에 속했다가 조선조 태조3년에는 고봉현(지금의 고양)에 속하기도 했다.

옛부터 용산 8경이라는 것이 있었다. 1경이 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이 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이 만초천(지금은 복개된 옥천)이 게 잡는 불, 4경이 동재기를 돌아오는 돛배, 5경이 밤섬에 지는 해, 6경이 검은돌모루(흑석동)를 돌아가는 스님, 7경이 노들나루의 행인들, 8경이 사촌(삼각지)의 저녁비가 그것이었다.

가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노래에서 한강인도교에 이르는 벌판이 모래(내)마을 즉 '사촌'이었다.

조선조 초기 사육신에서 조선조말 천주교도 처형장으로 이름난 새남터도 이 사평의 남쪽 가장자리터란 뜻이다.

1950년 전후까지만 해도 지금의 이촌동 강가에 50~60호의 오두막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한다.

삼각지 로터리로부터 동쪽으로 완만하게 구릉져 야산을 이루고 있는 이 산 이름이 둔산 또는 둔지산. 둔지산이란 '밋밋한 산'이라는 뜻도 되지만, '군대 주둔지'란 뜻도 있다.

그 '군대 주둔지' 의 뜻에 걸맞게 육군본부(지금의 전쟁기념관)와 국방부가 둔지산 기슭에 자리잡았음은 둔지라는 땅이름 탓일까.

조선조 초기부터 이 곳에 별장을 두고 관선을 관장케 했다. 관선이 광나루 4척, 송파 9척, 양화진이 9척인데 비해 이 둔지산이 끝나는 한강진에 15척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강병영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또, 둔시산에는 무운을 비는 사당인 무후묘가 근대에 이르기까지 있었다. 묘당은 중국의 무신인 관우와 한국의 무신인 김유신을 함께 무셨는데 노일전쟁때 일본군이 둔지산에 병여을 구축하면서 보광동으로 옮겨졌다.

둔지산 일대는 한강의 수군을 배경으로 한 전략적 요지였다. 임진왜란때는 침략의 선봉장격인 왜의 고니시의 주력 부대가 이곳에 주둔하기로 했다.

또 임오군란때는 진압을 구실로 출병한 청나라 오장경 부대가 주둔한 적도 있다.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 바로 그 부대였다.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과 노·일전쟁때 일본군 여단사령부가 이곳에 기지를 둔 것이 시초가 되어 일제때 조선군 사령부가 이 터에 자리잡았다.

광복뒤에는 육군본부와 국방부,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가 이 둔지산에 자리잡았음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둔지산을 한때는 왜둔산 또는 외둔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남쪽에 왜병영이 있다하여 남영동이란 땅이름이 생겨났다. 또, 이 일대는 한강나루와 맞닿는 곳이기에 여러 관창이 많았다. 오늘날 수도여고앞 남영동 일대에도 군자감의 커다란 군수창고가 있었다.

둔지산은 임진왜란 이후로 우리 역사에 그 땅이름처럼 아군과 외국군의 주둔지였다. 온통 무로 얼룩진 땅이다.

입력시간 2001/06/0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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